충남기념물 제135호 ‘홍주향교(洪州鄕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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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기념물 제135호 ‘홍주향교(洪州鄕校)’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20.10.20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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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자란 땅’ 천년홍주 100경 〈22〉

향교(鄕校)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경국대전’의 ‘이전(吏典)’에 의하면 충남에는 2개(홍주·공주)의 목(牧)이 중심이었고, 홍주(洪州)에는 군(郡)이 없었으나 충남의 22개현(縣)중  에 결성(結城)에 현이 있었으므로 충남의 향교 34개 중 홍주에는 ‘홍주향교(洪州鄕校)’와 ‘결성향교(結城鄕校)의 2개의 향교가 있어 교관으로 교수(敎授)와 훈도(訓導)등이 배치돼 교육을 담당했다. 

홍주목이 90명, 결성현이 30명의 비율로 배정됐고, 주요학과는 소학과 4서5경이었으며, 이밖에도 근사록(近思錄)과 제사(諸史) 등이 학습됐는데 이외의 향학(鄕學)에 대한 철학, 규칙 등은 ’경외학교사목(京外學校事目)에 상세히 기록돼 있다. 향학의 감독과 장학은 지방수령의 능력과 교육방침에 따라 성쇠(盛衰;성하고 쇠함)가 판단됐고, 지방유지의 노력에 의해 성과여부가 결정됐다. 향교(鄕校)에서 교육을 마치면 당연히 과거시험(科擧試驗)에 응시할 권리가 주어졌다.
향교는 문묘(文廟), 명륜당(明倫堂), 교궁(校宮), 성균관의 축소된 형태로 주(州), 부(府)에는 교수 7명, 군현에는 훈도 각 1명씩 뒀고, 교생의 정원은 각 30명씩으로 독서일과를 수령이 매월 관찰사에게 보고해 우수한 교관에게 호역(戶役;집집마다 다 나와서 하는 부역)을 감했다.

향교는 고려 충렬왕 때부터 각지에 설립해 왔는데, 태조 때에는 진흥에 주력해 마침내 각 읍에 1교씩 설립됐다. 국왕은 향교의 유지를 위해 학전(學田;고려와 조선 시대, 교육 기관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국가나 민간에서 지급하는 토지)에 주력해 주·부(州·府)등 큰 고을에는 7결(七結;농지의 수확고를 기준으로 한 토지면적 단위로 소가 4일간 갈 수 있는 면적이라 추정하는데, 4800~5000평이 될 것으로 보이나, 1결의 명확한 면적은 현재로서는 알 수 없음), 군·현(郡·縣) 등 작은 고을에는 5결(五結)을 지급했다. 그밖에도 지장의 징수 또는 출자에 의한 매수 토지도 적지 않아 1918년 당시 전국의 향교 수는 335곳으로 소속 토지는 48만여 평이었다. 하지만 향교는 중엽 이후 거의 무기력해 교수·훈도가 폐지됐고,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이 마비돼 중종(中宗) 때부터 일어난 사학(私學)인 서원(書院)이 이에 대치되다시피 했다. 향교는 유생을 지도하는 것 이외에도 민간에게 도덕적, 예의적 학풍을 수립시키는 일에 힘썼다. 

‘홍주향교(洪州鄕校)’를 처음 지은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고려 말에 세웠다고 전한다. 건물의 배치는 낮은 구릉지에 앞쪽에는 교육 공간인 명륜당(12평)이 있고 뒤쪽에는 정남향으로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대성전(26평)이 있어 전학후묘(前學後廟;문묘, 서원, 향교에서 각 건물을 배치하는 방법의 하나로 앞쪽에 학업용 건물을, 뒤쪽에 묘당을 배치하는 것)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좌향은 간좌곤향(艮座坤向;흐르는 산맥의 간방을 등진 8방의 하나인 서남향)으로 남서향을 하고 있다. 명륜당 전면 좌우에 있던 동재, 서재는 일제 때 훼철됐고 전사청(13.8평)만 남아있다. 대성전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이며, 안쪽에는 공자를 비롯해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대성전 이외에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강당인 명륜당을 비롯해 동무(東廡;7.6평)와 서무(西廡;6평)·전사청(13.8평)·수복실(12평)·제기고(4.6평)·내삼문(4.4평)·외삼문(3.8평) 등의 건물이 남아 있다. 칠의비(七義碑), 홍살문, 하마비 등이 있다. 또한 축문을 태우는 망료대, 불을 밝히는 청료대, 손을 씻는 관수대 등의 석물도 남아 있다. 이는 유교에서 예를 올릴 때 사용하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았다. 재산은 대지 1661평, 논 1579평, 임야 4805평으로 기록돼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홍주향교의 위치가 홍주의 북쪽 3리에 있다고 했는데, 이는 현재의 위치(홍성읍 대교리 239-1)로 추측된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홍주향교에는 조선전기에 종6품의 교수가 파견됐고, 조선중기에 제독관제도가 실시될 때에는 6품의 문관으로 제독관이 파견됐다 고 전해진다. 

홍주향교는 1400년(정종 2년) 경성의 문묘와 더불어 화재로 불탔고, 조선 태종 8년(1408)과 태종 18년(1418)에 수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569년(선조 2년)에 화재로 전소됐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방화로 전소됐으며, 1894년(고종 31년) 서재에서 공부하던 오경근, 최민지, 방세웅, 방석규, 이준복, 서종득, 최학신 등이 동학군에 의해 살해됐고, 문묘도 소실됐다. 이후 몇 차례 재난을 당한 뒤 1871년(고종 8년)에 향교의 대성전을 중수했고, 1880년에는 동·서무와 중삼문이 신설됐다. 1893년에는 대성전이 중수됐고, 1914년에는 대성전과 후원이 수선됐으며, 1924년에는 문묘 전부가 대대적으로 중·보수됐다. 현대에 들어서는 1958년, 1972년에 각각 중·개수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최근에는 1991년부터 이상선 군수의 지방비 지원으로 전교 이건엽이 대성전 기와 개수와 전사청, 명륜당, 칠의비 등을 보수했고, 화장실과 고직사 1동을 지어 향교의 면모를 갖췄다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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