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강에는 낙화암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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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강에는 낙화암 -66
  • 한지윤
  • 승인 2020.11.18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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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538년 봄, 백제 제26대 임금인 성왕(聖王)은 마침내 도읍지를 사비성(泗沘城)으로 옮겼다. 이것은 백제의 세 번째 도읍지이자 마지막 도읍지였다. 성왕은 도읍지를 옮긴 후 밖으로 중국 남쪽의 큰 나라인 양(梁)나라와 교통을 열고 중국문화를 부지런히 수입해들이는 한편 안으로는 부세를 덜고 역사를 줄이는 등 나라를 다시 추켜세우려고 안간힘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때 백제는 또 하나의 뜻하지 않은 강적을 만나 커다란 위협을 받고 있었다. 즉 동쪽의 신라가 점차 강성해져서 한강 경계선으로 밀고 나가 고구려와 대항하면서 전날 백제의 영토를 전부 차지하게 되었다. 일찍이 백제와 신라는 삼년산성을 중심으로 하여 서로 대치하다가 한동안 잠잠하더니 신라 진흥왕(眞興王)이 한산주(漢山州)를 차지한 후부터 신라는 다시 백제의 삼년산성을 무찌르고 옥천(沃川)방면으로 내려오기 시작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성왕은 노발대발하였다.
“저 신라 놈들이 우리와 동맹하여 고구려를 막은 지도 근 백년이 되는데, 이제 하루아침에 배신하고 쳐들어오다니 괘씸하도다. 저 하잘 것 없는 신라 놈들을 쳐야 한다. 이제 우리의 원수는 고구려가 아니라 저 신라 놈들이다!”
성왕은 우선 백제와의 화친을 위해 와있는 신라의 여인들을 모조리 돌려보낸 다음 신라에서 빼앗긴 구천(狗川, 즉 옥천)을 치기로 작정하였다. 험준한 산악지대에 자리 잡고 있는 구천은 신라의 공격을 막는데 커다란 의의가 있을 뿐 아니라, 신라의 사벌주(沙伐州)를 들이치기에도 적당한 지점이었다.
554년 가을, 성왕은 구천을 기습하기 위하여 단50기를 이끌고 은밀히 출전하였다. 낮에는 숲 속에서 쉬고 밤에만 행군하여 마침내 구천성하에 이르렀다.
밤의 장막에 덮인 구천성은 불빛 한 점 보이지 않고 죽은 듯 고요하였다. 왕은 군사들을 멈추고 잠깐 외로운 성을 바라보더니 50기를 이끌고 곧바로 성문을 향해 달려갔다.

“어잇, 멈춰! 어디서 오는 군사들이냐?”
그 때 성루에서 파수병들의 목소리가 밤하늘을 흔들며 들려왔다.
“대왕께서 급히 보내온 군사다. 어서 성문을 열어라!”
성왕의 부하 장수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서면서 대답하였다.
“대왕께서 보내 온 군사라고? 우린 그런 기별을 못 받았다. 아무리 대왕께서 보낸 군사라 해도 밤에는 입성하지 못한다. 날이 밝기를 기다려라!”
“잔말 말고 빨리 성문을 열어라. 여기 대왕의 친필 서한이 있다.”
백제의 장군과 신라의 파수병들이 이렇게 수작을 할 때 별안간 북소리가 쿵 하고 울리더니 근처에 매복하고 있던 신라 군사들이 소리를 지르며 노도같이 뛰어나왔다. 콩알만 한 구천성 쯤은 의식하지도 않고 단숨에 무찔러 버렸던 성왕과 백제 군사들은 이 뜻하지 않은 공격 앞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신라 군사들은 어느새 백제 군사들이 온다는 것을 탐지하고 매복해 있었던 것이다.
신라 군사들은 백제군을 가운데 몰아넣고 마구 화살을 날렸다.
“윽ㅡ”
적군의 포위를 간신히 뚫고 도망치던 성왕이 화살을 맞고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살아남은 백제 군사들은 왕을 구해 정신없이 산 속으로 도망쳤으나 왕은 얼마 가지 못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리하여 백제와 신라의 동맹은 드디어 깨지고 백제는 신라와 고구려를 동시에 맞서 싸우는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고구려와 손을 잡고 신라를 쳐야 한다!’
성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위덕왕(威德王)은 신라에 대한 복수전을 대대적으로 벌리면서 고구려와 화친하기 위하여 꾸준히 노력하였다. 그 후 혜왕(惠王), 법왕(法王)을 지나 무왕(武王)대에 이르러서는 고구려와의 관계를 크게 개선하였으며, 당나라와의 외교도 적극적으로 벌였다. 그러다가 백제의 마지막 임금인 의자왕(義慈王) 초년에 이르러 백제와 고구려는 이전의 모든 원한을 풀고 두 나라가 협력하여 신라에 대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부패무능한 백제 지배계급의 사치한 생황은 변함이 없었다. 일찍 태자 시절에는 해동증자(海東曾子)라는 찬사까지 듣던 의자왕이었건만 일단 권력과 사치의 재미를 맛보자 그의 음란한 생활은 선대왕들을 무색하게 하였다.
의자왕은 우선 태자궁을 호화롭게 짓고 바다도 보이지 않는 곳에 망해정(望海亭)이라는 정자까지 짓느라고 백성들을 괴롭혔으며, 후궁도 수 백 명이나 두었다. 그러다보니 후궁소생이 41명이나 되었는데 그 많은 왕자들에게 모두 좌평이라는 일등급 벼슬을 내리고 식읍을 주는 등 백제의 정사는 그야말로 뒤죽박죽이 되었다.
“대왕, 놀이를 삼가고 정사에 정력하시오. 후궁에 궁녀가 너무 많소. 후궁을 신칙하시고 궁녀들을 줄이시오.”
“신라와 당의 움직임이 수상하오. 이러다간 이 나라 사직이 위태롭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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