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 또한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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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 또한 성장한다
  • 윤정용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1.02.04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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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보이후드>(2014)를 드디어 봤다. 이 영화는 <비포 선라이즈>(1995~2013) 시리즈로 유명한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영화로서 메타크리틱 전문가 평가에서 100점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 영화를 제외하고 100점을 받은 영화는 <대부>(1972)와 <시민 케인>(1941)뿐이다. 이 영화는 여섯 살 소년 메이슨(엘라 콜트레인)이 대학에 들어가기까지 실제 시간에 맞게 촬영해 촬영 기간이 무려 12년에 달하는 ‘전설적인’ 영화다. 간단히 말해 이 영화는 주인공 메이슨의 ‘성장영화’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의 누나 사만다, 그리고 그들의 부모의 성장영화이기도 하다. 엄마와 아빠는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들을 낳았고 얼마 후 이혼한다. 엄마는 더 나은 생활을 위해서는 학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아이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휴스턴으로 이사를 간다.

엄마는 휴스턴에서 대학을 다니고 강의실에서 만난 대학교수 빌과 결혼한다. 메이슨과 사만다는 빌의 아이들인 민디와 랜디 남매와 한 가족이 된다. 하지만 얼마 후 빌은 알코올 중독자가 되고 아이들뿐만 아니라 그녀에게도 폭력을 행사한다. 그녀는 사만다와 메이슨을 데리고 도망쳐 다른 지역에서 새로운 삶을 산다. 대학강사가 된 그녀는 매력적인 퇴역 군인 학생과 결혼을 한다. 하지만 그 또한 알코올 중독자에다가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며 그녀와 아이들을 괴롭힌다. 결국 그녀는 또다시 이혼한다.

휴스턴으로 이사하기 전 메이슨은 엄마에게 아빠를 사랑하느냐고 묻고, 엄마는 아빠를 사랑하지만 “그렇다고 같이 사는 게 모두에게 좋은 건 아냐”라고 답한다. 아빠는 메이슨과 사만다를 만나러 휴스턴에 온다. 그는 아이들과 볼링도 치고 재미있는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사소한 말다툼으로 그들은 또다시 크게 싸우게 되고 결국 아이들과 바람처럼 그들의 재결합은 이뤄지지 않았다. 아빠는 아이들과 만나 캐치볼도 하고 야구장도 함께 가는 등 아이들과 재미있게 놀아준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아빠와 아이들이 만났을 때 하는 행동이나 이야기 주제도 바뀐다. 함께 정치적인 이야기도 나누고 정치 운동도 함께 한다. 심지어 그는 자신과 아이들 엄마의 옛이야기를 들려주며 사만다에게는 성교육도 한다. 그는 메이슨과 둘이 캠핑을 가서는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메이슨이 기억하는 아빠는 뮤지션이고 무조건 인생을 즐기는 낙천적인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현실적이고 책임감을 느끼는 진정한 어른이 됐다. 메이슨이 아빠에게 “이사는 지겹다”라고 말하자 아빠는 “이사를 해야 되면 해야지”, “그래도 주말마다 갈게”라고 말하며 현실을 받아들인다. 아빠는 예전에 아이들을 만났을 때는 단지 재미있게 놀아주는 것에 만남의 목적을 뒀다면 이제는 부모로서 아이들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충고를 해준다.

아빠는 재혼해 자식을 낳았고, 엄마는 그토록 원하던 대학교수가 됐다. 메이슨의 고등학교 졸업식 파티 때 엄마와 아빠는 지난 일들을 이야기하며 화해한다. 아빠는 바에서 메이슨에게 “네가 책임져야 할 건 너”라고 말하는데, 이 말은 메이슨에게 하는 말이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린다. 엄마도 메이슨과 사만다에게 이사를 통보하며 불평하는 그들에게 “스스로 책임질 나이”라고 말한다. 이 또한 직접적으로 메이슨과 사만다에게 하는 말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로 들린다.

메이슨은 자식을 둘 낳아 대학 보내놓고 이제는 죽을 일만 남은 것 같다고 한탄하는 엄마를 위로하고 집을 떠난다. 그는 새로운 룸메이트 닉, 그의 여자친구 바브, 그리고 그녀의 룸메이트 니콜과 마약을 섞은 브라우니를 나눠 먹고 하이킹을 떠난다. 니콜은 언덕에 앉아 절경을 바라보며 메이슨에게 “지금 이 순간을 잡아라(Seize the moment)”라는 경구를 역으로 “순간이 우리를 붙잡는다(The moment seizes us)”라고 말한다. 메이슨은 “시간은 영원하고 순간은 바로 지금을 말하는 거잖아”라고 말하며 그녀의 말에 동의한다. 이 말은 메이슨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앞으로 어린 딸을 키워야 하는 아빠, 사만다, 그리고 메이슨이 떠난 뒤 이제야 비로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보고 싶다는 엄마 모두에게 해당된다. 영화 <보이후드>는 아이뿐만 아니라 어른도 성장한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TV드라마 <응답하라 1988>(2015~2016)에서 덕선(혜리)은 첫째 언니와 막내 남동생 사이에서 그동안 묵혀온 둘째의 서러움을 생일날 폭발한다. “왜 맨날 나한테만 그래? 내가 만만해?” 난 뭐,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사람이야?”, “왜 나만 계란후라이 안 해 줘? 내가 계란후라이 얼마나 좋아하는데, 맨날 나만 콩자반 주고.” “통닭도 아저씨가 나 먹으라고 준 건데, 닭 다리는 언니랑 노을이한테만 주고 나만 날개 주고. 나도 닭 다리 먹을 줄 알거든!” 그녀는 생일을 따로 챙겨줬으면 하는 섭섭한 마음을 드러낸다. 

아빠 동일(성동일)은 그녀의 마음을 이렇게 달랜다. “저기, 덕선아. 아빠도 우리 덕선이한테 뭐 하나 줄 것이 있는디. 짜잔! 우리 덕선이 생일 축하한다. 아빠 엄마가 미안허다. 잘 몰라서 그래. 첫째 딸은 워치게 가르치고, 둘째 딸은 워치게 키우고, 막둥이는 워치게 사람 맨들어야할 줄 몰라서. 이 아빠도 태어날 때부터 아빠가 아니잖애. 아빠도 아빠가 처음잉께, 그러니까 우리 딸이 쪼까 봐줘.” 이 대사의 주어가 아빠가 아니라 엄마, 또는 어른으로 바꿔도 맥락은 크게 다르지 않다. 어른도 처음이기 때문에 어른이 되기까지 수없이 많은 실수를 한다. 같은 실수를 해서는 안 되는데 똑같은 실수를 또 한다.

주지하듯 《논어》의 〈위정편〉에는 “나이 사십부터는 세상일에 미혹되지 않는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예전에는 이 문장을 서술문으로 읽었다. 그런데 이 나이를 지나고 보니 이 문장이 서술문이 아니라 당위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위문으로 이 문장은 ‘미혹되지 않는다’가 아니라 ‘미혹되지 않아야 한다’로 읽혀야 한다. 그냥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비단 마흔 살에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드라마 <아무도 모른다>(2020)는 ‘좋은 어른을 만났다면 내 인생은 달라졌을까’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실제로 어떤 어른을 만나느냐에 따라 드라마 속 주인공의 삶의 행로는 달라진다.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간에 아이는 자라나 반드시 언젠가 어른이 된다. 그리고 남은 긴긴 어른의 시간 동안 어떤 사람으로 살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른이 됐다고 다 끝나는 게 아니라 좋은 어른이 돼야 끝나는 것이다. 좋은 어른은 그냥 되는 게 아니라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어른들 또한 성장한다. 아니 마땅히 성장해야 한다.

윤정용 <문학평론가·칼럼·독자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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