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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명옥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1.02.18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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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우리는 드러난 상처는 비교적 빨리 치료를 받지만,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은 상처는 외면하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가족에게 발생한 충격적인 사건은 회피하고 싶은 마음에 외면하는 경우가 많지만 유사한 사건이 발생하면 더 큰 충격으로 반응하기 쉽다.    

S는 딸의 과도한 게임 문제로 여러 차례 상담실에 내방했다. 어느 날 이야기를 나누던 중 눈시울을 붉혔다. 남동생이 도박중독으로 수년간 연락이 두절되다가 자살했고, 시누이가 부부갈등으로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자살하면서 온 가족이 충격 속에 허우적거렸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지금까지 가족의 자살 사건은 가족 비밀이 되어 그 누구에게도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는데, 상담자에게 이야기를 하고 보니 실오라기를 하나도 걸치지 않은 알몸이 된 것 같다고 했다. 

S는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 열심히 다녔다. 교회를 중심으로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냈다. 결혼 적령기 때 지인이 소개해 준 신앙 좋은 청년을 소개받아 몇 번의 만남 후 결혼을 결심했다. 결혼 후 공부를 지속해야 하는 남편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직장생활을 영위했다. 출산과 양육, 그리고 직장인으로서 삶의 무게가 버거울 때마다 매사에 긍정적인 남편에게 감정을 토로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알맹이 없는 메아리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양쪽 집안에 자살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집안 분위기는 초토화됐고, 가족들은 온 몸에 총알을 맞은 듯 나뒹굴었지만, 소리 내어 통곡하지도 못하고 가슴을 움켜쥐며 떠나보내야 했다.   

미국정신의학회의 정신장애진단 통계편람(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 : DSM-5)에 따르면 죽음, 죽음에의 위협, 심각한 상해 및 폭력을 직접 경험, 위협 당하거나 목격한 사건을 일컬어 심리적 외상(trauma)이라고 한다. 심리적 외상과 관련된 전형적인 증상으로는 외상적 사건의 지속적인 재경험, 외상과 연합된 자극회피 행동, 일반적 반응의 감퇴 등이 있으며, 이러한 증상이 한 달 넘게 지속되고 현저한 고통과 기능 장해를 초래할 때 이를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 PTSD)라고 했다. 

S는 대학생인 딸이 타 지역에서 자취하는데 몇 시간 동안 연결되지 않자 공포감이 엄습했다. 폭풍처럼 밀려온 부정적인 생각 때문에 총알택시를 타고 자취방으로 향하면서도 몇 초 단위로 전화를 걸었다. 문을 거칠게 두드리고 전화번호를 무수히 눌렀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급기야 경찰의 도움을 받아 방에 들어가니 딸은 헤드셋을 낀 채 곤한 잠을 자고 있었다. 놀란 눈으로 S를 쳐다보는 딸에게 걱정스런 마음과 달리 큰소리로 울부짖으면서 여기저기를 때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감정을 추스린 후 S는 자신이 과도하게 반응한 것을 깨달았다.
 
자살학의 창시자인 에드윈 슈나이드먼(Edwin Scheidman, 1918-2009)은 자살한 사람은 자살 유가족의 정서적 옷장에 자신의 심리적 유골(Psychological Skeleton)을 넣어 놓아서 자살 유가족이 평생의 짐을 지고 살아가야 한다고 했다. S와 가족들에게 죄책감과 외상적 상실 경험을 안겨준 남동생과 시누이의 자살로 유가족은 지금도 서로 비난하고, 원망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살에 관한 이야기를 쉬쉬 한다. 그 여파로 가족 간 교류가 이뤄지지 않으며, 가족들의 발달주기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S는 신앙을 갖고 있기에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행동했고, 자신의 감정을 혼자서 삭히는 방식으로 견뎌내려고 지금까지 노력했다. 하지만 딸 때문에 방문한 상담실에서 비밀의 옷장을 걷었을 때 공감과 위로를 통해 자신뿐만 아니라 자녀들과 유가족을 돌아보게 됐다. 

우리는 요람에서 무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상처를 경험한다. 그때마다 빗장을 걸고 주변인들과의 단절을 선택한다면 그 상처는 더 곪아서 심리적 암을 선고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힘들고 상처로 통증이 있을 때는 주변에 도움 청하기를 권면한다. 결과적으로 치유된 상처는 자녀뿐만 아니라 유가족을 도울 수 있는 의미 있는 원동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최명옥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 충남스마트쉼센터 소장·상담학 박사·칼럼·독자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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