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은교’ 그리고 사랑, 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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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은교’ 그리고 사랑, 늙음
  • 김상구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12.05.10 11:1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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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머리칼이 희끗희끗해지고 눈가에 주름이 쪼글쪼글해지면 세월의 무상함이 밀려오고, 내가 그동안 무엇을 하고 살아 왔나 하며 지난 삶을 뒤 돌아 보게 된다. 기우는 해를 바라보는 마음은 다급하며 가버린 날들을 돌아보는 눈길에는 한숨이 깃들게 마련이다. 이런 마음은 옛사람이나 요즘 사람이나 다를 바 없다.

고려시대 시인이었던 우탁(1263-1342)은 늙어감을 탄식하며 ‘늙지 말려이고 다시 젊어 보렸더니/ 청춘이 날 속이고 백발이 거의로다/ 이따금 꽃밭을 지날 제면 죄 지은 듯하여라.’하며 자신의 초라한 늙음을 젊음의 꽃밭과 대비하여 죄지은 듯 슬퍼하고 있다. ‘한 손에 가시를 들고 또 한 손에 막대 들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며 막대 들고 역동적으로 늙음을 내쫓아 보지만 오히려 지름길로 달려오는 늙음 앞에 우탁은 좌절하고 만다. 오는 세월 막을 수 없고 가는 세월 잡을 수 없는 것이 인생사다. 그러나 인생이 그렇게 허무하게만 늙어 가는 것은 아닌 듯 싶다.

노(老) 시인 이적요와 여고생의 사랑을 다룬 박범신 소설 ‘은교’가 영화화 되어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膾炙)되고 있다. 영화의 내용 보다는 젊은 여배우의 전라연기가 이 영화의 화제거리다. 꼭 그렇게 다 벗었어야 하느냐, 그곳을 음영처리라도 했어야 하지 않느냐, 여배우의 부모는 시사회에 나왔느냐 등등. 그러나 이 영화에서 여배우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어도 영화가 추하게 보이지 않는 것은 그러 그러한 장면들이 이 영화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라연기에 대한 이야깃거리는 오히려 영화마케팅의 전략인지도 모르겠다. 노 시인, 이적요의 늙음에 관한 ‘존재론적인 슬픔’의 탐구가 소설과 영화의 주제다. 몸은 늙어가지만 마음도 그것에 비례하여 늙어가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고생 은교가 이적요의 집에서 청소를 하고 그의 일상을 돕게 되자 그는 삶에 활기를 얻고 은교를 사랑하게 된다. 여기서의 사랑은 젊은 남녀의 사랑과는 다른 사랑이라 할 수 있다. 그녀의 존재는 이적요의 에너지가 된다. 무료하게 살아가는 노인에게 은교는 활력소이며 삶의 촉매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삶을 바꾸어 놓는다. 사랑하는 대상에게 이미 존재했던 모습이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그것을 처음 발견한 듯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고, 사랑받는 사람은 상대방이 자신의 가치를 발견한 유일한 사람이라고 기뻐한다. 비록 자신에게 그런 면이 없다 할지라도 상대방이 발견한 모습을 갖추기 위해 노력한다. 신이 세계를 창조한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도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힘을 가지게 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그래서 사랑은 친숙해있던 나를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놓는 신(神)적인 힘을 지닌다. 집에서 천덕꾸러기 같은 존재였던 은교는 이적요의 집에 온 후 ‘할아버지, 내가 이렇게 예쁜 아이인지 몰랐어요’라고 말한다. 이적요의 사랑이 은교에게 전해진 결과다. 이적요가 은교에게 느끼는 사랑은 ‘너를 사랑하니까 너도 나를 사랑해’와 같은 사랑은 아니다. 그러나 제자 서지우는 당신의 사랑은 추해보인다고 질투한다. 그에게 좀 더 연륜이 필요해 보인다.

할아버지가 집에서 기다리는 손녀를 위해 사탕을 사들고 바삐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이적요의 모습에 어른거린다. 자신의 문학관 건립을 위해 제자들과 모임이 있는 날, 그는 은교와 저녁을 먹기로 되어 있어서 제자들과 식사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이적요에게 은교는 지나가버린 젊음에 대한 향수와 같다. 이적요의 의식은 플래쉬백(flash back)하여 젊은 날로 돌아가고 은교와의 사랑을 꿈꾼다. 이적요에게 은교는 젊은 날의 소중한 사랑, 꿈이었으며 절대적 아름다움이었는지도 모른다. 할아버지에게 손녀가 눈에 밟히듯 은교는 그런 존재다.

서지우가 이적요의 원고를 훔쳐 문학상을 받는 자리에서 이적요는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이 나의 늙음도 나의 잘못에 대한 벌이 아니다’라는 연설을 한다. 늙음은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것이며 젊음도 잠시 왔다 사라지는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늙음은 서글프게 다가올 수 있다. 그러나 노년에 서글픔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청춘이 지나온 자국이 노년이기 때문이다. 젊어서는 젊음의 소중함을 모른다. 그래서 조지 버나드 쇼는 ‘젊음은 젊은이에게 주기엔 너무 아깝다.라고 ...

영화 ‘은교’는 이적요를 통해 삶이 무엇인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여배우가 얼마나 옷을 벗었느냐는 영화 ‘은교’의 묵직한 주제에 큰 영향을 주는 요소가 아닌 듯 싶다.

<홍주일보·홍주신문 칼럼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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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빈 2012-06-13 23:44:22
저는 책은 읽지 않고 영화만 봤습니다.
사소한 물건조차도 감정을 못느끼는 못난 젊은작가 서지우가 감히 어떻게 선생 이적요의 사랑을 알아볼수가 있었을까요.
은교의 벗은 모습보다 이적요 선생의 낭떠러지까지 가는 사랑의 모습이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교수님 좋은 글 읽었습니다. ^^

홍민정 2012-05-11 12:00:47
처음 책이 나와을때 책 마케팅은 박범신작가의 첫 연애소설이라고 했던 신문광고가 생각납니다. 영화 은교도 본질의 심오함을 광고로 담기에는 약해서...가볍게 치고 들어온 전라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아직 영화는 보지 않았지만...은교를 많이 추천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런책이다 이야기는 못하고...걍 꼭 보시라고....그때는 그때의 소중함을 잘 모를수 밖에요. 좋은글...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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