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한시름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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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한시름 놓습니다
  • 한학수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1.09.16 08:3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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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작은 일생이다. 날마다 부딪치는 것들에 대해 생활의 질감과 사물의 구체성을 확보하는 일이 그리 쉽지 않은 이유다. 우리는 삶의 주변 익숙한 것들에 주로 반응하며 살아가는 경향이 있다. 뜻하지 않게 마주치는 일, 좌절을 좌절로 아는 순간, 그곳이 출발선이 된다. 인생은 선택과 판단의 연속이다. 중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전략적 사고를 해야 하는 이유다. 내공을 쌓지 않고 섣불리 무대에 오르면 자신감을 잃고 패하기 십상이다. 사람의 속생각은 말로 나타나고 말은 행동으로 본심을 드러낸다. 어느 경우에도 허세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성공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들 대부분은 세계정세를 보는 안목과 통찰, 정확한 판단력이 없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래서인가 철학자처럼 사색하고 농부처럼 일하라고 하지 않던가. 삶에서 성실은 사물의 시작이요, 또한 끝이다. 우리에게는 바로 보고 바로 생각하는 건전한 합리적 사고가 꼭 필요하다. 게다가 ‘날마다 모든 일에서 나는 점점 좋아지고 있다’라며 자신을 위로하며 삶에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거다. 그리스도도 ‘네가 믿는 대로 되리라’라고 응원한 바 있다. 

생활에서 시간은 가장 결핍된 자원이다.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를 보고 인간의 성패(成敗)와 현우(賢愚)를 판단할 수 있다. 톨스토이도 ‘가장 중요한 시간은 현재’라고 말한 바 있다. 그날그날이 최선의 날이며 오늘이 제일 중요한 날인 셈이다. 매사에 집중적 훈련할 때 하나의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진다. 창조에는 헌신이 요구되고, 몰아(沒我)가 필요하고, 인내가 수반되고, 정성이 따라야 한다. 책임을 자각하는 것이 삶의 시작이요, 책임을 완수하는 길이다. 보보등고(步步登高)라는 사자성어는 높은 산에 올라가려면 한 걸음 한 걸음 쉬지 않고 올라가야 한다는 의미다. 부단히 공부하고 준비하다 보면 기회는 반드시 온다. 사람은 성장 과정에서 교육으로 완성된다. 교육의 성과로 사회를 이루고 더불어 살아가는 거다. 역사 속 인물 중에서 칭기즈칸이 싸움 잘하는 유목민 추장에서 13세기 세계 대제국을 건설한 지도자가 된 비결도 종교적 관용과 소통이었다.

삶에서 초심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지만 다른 길을 걷는 경우를 본다. 세월 지나, 먼 훗날 서로에게 상처를 줬다거나 잘못 판단한 사례는 두고두고 아쉽다. 노란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의 아쉬움처럼 말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슬퍼할 필요가 있을까. 여기까지 어떻게 왔을까 되뇌며 풀어나가야 한다. 가르침은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등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스치는 사람마다 다 스승일 수 있는 거다. 벅차고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비로소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상황이 나아질 이유가 하나도 없어 보이는 절망적인 시기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반전이 있다. 합리적이고 일관성 있는 기준으로 시시비비를 가리고 서로의 차이를 받아들이며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인내하고 포용해야 진정한 사회적 통합이 이뤄질 수 있다. 인간은 뒤돌아볼 때마다 어른이 된다고 한다. 기다리다 보면 누군가 비워 놓은 의자에 편히 앉아 쉬는 날도 있지 않겠는가.

폭넓게는 빈곤과 불평등 같은 사회 문제를 개선하고, 갈등의 요소를 줄여가며 서로의 등을 다독여 주는 거다. 그 과정에서 믿음과 진실, 믿음과 행동은 일치돼야 하는 것은 마땅하다. ‘너그럽고 잘 베풀었는가’라는 물음에 자연스레 응답할 수 있을 때 궁극적으로 높아진 삶의 질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궁극적으로 행복해지는 좋은 방법이라면 시선 그대로 사는 것이다. 하찮고 사소한 것들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거다. 요즘은 평범해도 나만의 행복과 만족을 얻으며 누가 뭐래도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 마이 싸이더 줄임말로 ‘마싸’라는 신조어가 있다. 이런 작은 개별 민중의 외침이 더불어 사는 세상 직전까지만 갔으면 좋겠다. 서로 감지하는 민주는 무너지지 않는 길에 자유를 수호하는 깃발이 펄럭이는 상태다. 인생길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아쉽도록 그리운 사람으로 남아야 한다. 

사람에게는 삶의 목표가 있다. 좌표는 직선이나 평면, 혹은 공간에서 특정한 위치를 지정하기 위해 사용하는 값을 뜻한다. 그래서 우리에겐 내년 삼월 어느 날이 너무나 중요하다. 탁월한 지도자는 나라가 자유롭게 번영할 뼈대를 멀리 보며 설계하고 치밀하게 시공하는 거다. 좌파와 우파, 여당과 야당을 모두 흡족하게 하는 지도자는 나올 수 있을까. 먼 어느 날 우리가 세상을 등질 때는 세상이 울고 우리는 기뻐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서 모두 현실을 자각하고 공멸을 피할 수 있는 길을 찾기를 고대하는 거다.

긴 삶의 과정에서 고통으로부터 해탈하는 길만이 자유로운 인간이 될 수 있는 길이다. 사람이 땀 흘릴 곳을 찾지 못하는 나라의 미래가 있겠는가. 함께 사는 사회의 질서를 결정하는 척도의 으뜸은 도덕적 에너지다. 도스토옙스키는 “분노는 정의를 촉발할 수 있지만, 정의 자체는 아니다. 정의를 완성하는 건 용서와 화해, 그리고 사랑”이라고 말한다. 가슴 두근거리게 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 마지막 제4악장은 운명에 대한 승리를 찬미하는 힘찬 멜로디로 끝나고 있다.

 

한학수 <청운대 방송영화영상학과 교수, 칼럼·독자위원>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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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S CHW 2021-09-17 23:19:34
좋은 글 항상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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