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 스님의 ‘알통’
상태바
노(老) 스님의 ‘알통’
  • 김상구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12.05.24 11:01
  • 댓글 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어느새 숲속의 녹음이 짙푸른 5월이다. 앞 다투어 피었던 꽃들이 잎과 가지에 자리를 내어준다. 무참히 떨어진 낙화를 보며 삶도 찰나(刹那)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던 꽃잎과 잉잉대던 벌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꽃의 시신들만이 지난날의 화려했었음을 과시한다. 그러나 꽃들은 그냥 지는 것이 아니라 잎과 가지에 에너지를 전이(轉移)시키고 열매를 견인해 낸다. 가을이 되면 낙엽은 뿌리로 에너지를 전달하고, 봄날 소생하기 위한 긴 호흡의 겨울도 준비할 터다. 신비한 자연의 질서를 보면서 삶의 무상(無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영국의 요절한 시인 셸리(Shelly)도 ‘겨울이 오면 봄이 멀 수 있으랴(If Winter comes, can Spring be far behind?)’고 자연의 경이로운 순환을 노래했다.

이러한 자연의 무상함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마음도 편안해 질것이다. 붙잡을 것도 없고 매달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삶도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조화(造花)를 만들어 꽃의 아름다움을 영원히 보고 싶어 하고,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려고 애를 쓰다 괴로워한다. 권력의 달콤함에 빠져 수갑을 차고 영어(囹圄)의 몸이 되기도 하고, 욕정을 이기지 못해 쇠고랑을 차기도 한다. 이러한 근원에 욕망이라는 리비도(Libido)가 자리 잡고 있다. 욕망은 삶을 유지시키는 기관차이면서 동시에 마음의 고향으로부터 낯선 곳, 더러운 곳으로 우리를 끌고 다닌다. 우리 마음의 본래 고향은 어디일까? 그곳을 어떻게 해야 볼 수 있고 도달할 수 있는 것인가? 깨우치려는 이들의 화두(話頭)일 수밖에 없다.

오래전, 수덕사가 인근에 있는 어느 온천에 들르면 어느 노(老) 스님을 우연히 그곳에서 만나곤 했다. 그 스님은 젊은 스님들 부축을 받으며 그곳에 오시곤 했는데 혼자서는 거동이 불편해 보였다. 탕 안에 그 스님과 단둘이 앉아 있게 되어, 머쓱한 마음으로 ‘혼자서 걸으시기 불편하시죠?’라고 여쭈었더니 노스님은 물속에서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해맑은 미소로 나오지도 않는 ‘알통’을 보여주시는 시늉을 했다. 아직 힘이 넘친다는 의사표시였다. 그 스님의 천진난만한 행동에 웃음이 절로 나왔던 적이 있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는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라고 노래한 적이 있다. 그는 어린이에게서 인간의 순수한 자성(自性)을 보았는지 모른다. 어린아이에게 다이어 반지를 주어도 조금 갖고 놀다 내던지고 만다. 그 반지를 다시 갖고 놀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어린아이는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는다. 그러니 어린아이의 얼굴은 해맑을 수밖에 없다. 욕심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험상궂게 만든다. 온천에서 만났던 그 스님은 욕심을 어린아이처럼 지워버린 것일까? 서예로 유명했던 노 스님은 얼마 후 그 온천에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무구한 모습이 인간본래의 자성이다. 그 자성은 원래 허공과 같아 깨끗한 모습이다. 욕망이 그 모습을 얼룩지게 할 뿐이다. 얼룩은 세월 따라 두껍게 자리 잡는다. 그 때를 벗겨내는 일이 수행(修行)이다. 고봉스님은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도 닦는 공부를 ‘지게에 눈을 져다가 우물을 메우는 것’(담설전정擔雪塡井)같이 하라고 후학들을 가르쳤다. 흙으로 우물을 메우는 일이야 쉽겠지만, 눈으로 우물을 메우는 일은 표시도 나지 않는 일이다. 그렇게 그곳에 도달하기가 수월하지 않음을 몸소 익혀보라는 이야기다. 끝없이 참회하고 기도해야만 요동치는 욕망을 누르고 맑은 물이 샘솟는 근원을 볼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스님뿐 아니라 우리 모두 그곳을 향해 가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

요즘 방송과 신문에서는 스님들이 술과 도박을 하는 장면들이 등장하고 술집을 드나들었다는 폭로가 이어진다. 폭로자의 언·행을 보면 스님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예전 고승들이 득도(得道)를 하고 계율을 넘나드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었지만, 이것은 득도의 사자후(獅子吼)라고 보고 싶다. 스님들이 계율을 지켜야만 본래의 자성에 안전하게 도달할 것이고 사부대중은 그들의 법문을 들으러 절집에 모여들 것이다. 부처님 오신날에 ‘알통’을 보여주려고 했던 해 맑은 얼굴의 노 스님과 어느 스님의 게송(偈頌)이 뇌리에 스친다.

‘재물과 여색을 저버리지 못하거든 도 닦을 생각 하지마라. 어리석은 중생심(衆生心)을 붙들고, 나 잘난 생각 갖고서는 도 닦을 생각 하지마라. 이런 것을 나 스스로 잘 깨달으면 한 순간의 번뇌가 사라질 것이고, 生·死의 마음도 다 끊어질 것이다. 우리가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수행하는 것이 별것이더냐, 다른 법이 없다. 이것을 명심하라’


<홍주일보·홍주신문 칼럼위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2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천두영 2012-05-26 23:08:24
좋은 글 감사합니다~~~ 나모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홍민정 2012-05-25 12:11:37
눈으로 우물을 메우는 일이 수행이다.
수행을 열심히 하고 싶은데...집안일들이 너무 많아서 힘들고 짜증이 난다고 질문을 드렸더니 집안일 열심히 하는것이 수행이다라고 말씀하시던 스님 생각납니다. 길상사 뜨락의 연등들은 극락이기도 하고...아니기도 하고...
좋은글 잘 읽습니다. 고맙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