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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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아무도 모른다
  • 윤정용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1.12.02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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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누구나 한 번쯤 ‘이솝우화’를 읽었거나 들어봤을 것이다. 이솝우화는 고대 그리스에 살았던 노예이자 이야기꾼이었던 아이소포스가 지은 우화 모음집이다. 이솝우화는 친숙한 동물이 나오고 도덕적인 교훈을 주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여전히 인기가 있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도덕적 교훈을 알려주기 위해 직접 이 책을 읽어주거나 아니면 읽으라고 권유한다. 이솝우화 가운데 <북풍과 태양>, <곰과 나그네>, <사자와 쥐>, <금도끼 은도끼>, <농부와 독사>, <양치기 소년>, <시골쥐와 도시쥐>, <토끼와 거북이>, <개미와 베짱이>, <여우와 신포도>, <여우와 두루미>,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등의 이야기가 비교적 널리 알려졌고 다양하게 변주되었다.

영국의 소설가 서머싯 몸이 쓴 <개미와 배짱이>(1924)라는 단편 소설이 있다. 이 작품은 프랑스의 시인 장 드 라퐁텐의 우화시집 《이솝우화》(1688)에 실린 같은 제목의 <개미와 배짱이>를 비틀어 쓴 작품이다.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라퐁텐의 《이솝우화》는 이솝우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솝우화의 <개미와 배짱이>에서 개미는 무더운 여름 동안에 땀을 뻘뻘 흘리며 일을 하고, 베짱이는 나무 그늘에서 노래만 부르고 놀기만 한다. 그러다가 여름과 가을이 끝나고 추운 겨울에 굶어 죽게 된 베짱이가 양식을 얻기 위해 개미에게 도움을 청한다. 이에 개미가 “여름에는 노래를 했으니 겨울에는 춤이나 추렴”이라고 하면서 베짱이의 도움을 거절한다. 반면 베짱이는 게을렀던 자신의 지난날을 부끄러워하고 반성한다.

몸의 <개미와 배짱이>에는 개미처럼 근검절약하는 형 조지와 집안의 지독한 골칫덩어리인 동생 톰이 등장한다. 톰은 나이가 오십 줄에 가까워질 때까지도 주변 사람들로부터 돈을 빌리고 그 돈을 흥청망청 써대며 향락적인 삶을 살아간다. 조지는 그런 동생의 빚을 갚느라 등골이 휜다. 그는 “신의 섭리를 다 하는 것에 나를 두는 삶의 상태에서 의무를 다했다”고 자신의 삶을 규정한다. 더 나아가 “톰은 게으르고, 쓸모없고, 무절제하고, 방탕하고, 수치스러운 악당”이기 때문에 “만일 정의가 있다면 그는 구빈원에 있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조지는 화가 잔뜩 나 있는 상태로 얼굴은 울그락불그락 달아올라 있다. 톰이 얼마 전 자기 어머니뻘 되는 귀부인과 재혼했는데 며칠 전 그녀가 죽었다. 그녀는 그에게 유산으로 50만 파운드의 현금, 요트 한 척, 런던과 시골에 각각 집 한 채를 유산으로 남겼다. 조지는 구빈원에나 가야 할 톰이 자신의 기대와 예상과 달리 갑부가 된 것에 분개하고 있다. 조지는 “이건 공평치 못해, 공평치 않단 말이야, 제기랄”이라며 평소답지 않게 욕설을 내뱉는다. 조지의 이야기를 들은 소설 속 화자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해 하마터면 의자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 그는 톰으로부터 종종 훌륭한 저녁 식사를 초대받는다. 사실 그가 톰에게 돈을 빌려주었다고 하더라도 1파운드도 되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톰이 친구들로부터 돈을 빌리는 것은 습관에서 비롯된 행위일 뿐, 거기에는 결코 다른 어떤 사악한 의도가 숨어 있지 않다.

몸의 소설에는 언제나 이런 큰 반전이 있고, 반전은 그의 소설을 읽는 가장 큰 즐거움 가운데 하나다. 앞에서 몸은 <개미와 베짱이>를 통해 이솝우화의 교훈을 비틀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는 이 작품에서 개미처럼 모범적인 삶을 산 조지를 조롱하며 베짱이처럼 향락적인 삶을 즐긴 톰을 옹호하는 것일까? 얼핏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소설 속 화자는 소설에서 조지를 시종일관 “가엾게(poor)” 여긴다. 하지만 작가 몸이 소설 속 화자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의미는 ‘인생은 결코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조지의 근면 성실한 삶의 태도는 분명히 존경을 받을 만하지만, 자신만의 잣대로 다른 사람의 삶을 평가하고 재단하는 그의 태도까지 존경하기는 어렵다. 몸은 조지의 그런 완고하고 경직된 태도를 가엾게 여기고 있다. 그렇다고 그가 조지의 삶을 재미없고 지루한 것으로 여기는 톰의 태도를 결코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몸이 생각하기에 인생은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한 가지 잣대로 평가하기 어렵다. 각자 출발선도 다르고, 과정도 다르다. 중간에 다른 길로 빠질 수도 있고, 심지어 전혀 다른 곳에 도착할 수도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성공에 있어 노력과 운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라는 질문을 수없이 한다. 보통 자신이 성공하면 노력 덕분이고 다른 사람이 성공하면 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자신이 실패하면 운이 없어서고 다른 사람이 실패하면 노력이 부족해서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해야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나심 니콜라스 탈렙의 《행운에 속지 마라》(2004)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의 국내 번역본 부제는 ‘불확실한 시대에 살아남는 투자 생존법’이다. 이 책의 추천사를 쓴 한 이코노미스트는 “예측의 정확성은 상당 부분은 운에 달려 있기 때문에 안정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서는 확률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며 더 나아가 자신이 어떤 포지션을 쥐고 있는지에 대해 이해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직업적으로 투자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투자에 관한 이야기로만 읽히지 않고 인생 전반에 관한 이야기로 읽힌다.

그런데 투자와 인생 간에는 차이점이 하나 있다. 일반적으로 투자는 돈을 따는 사람과 돈을 잃는 사람이 있는 일종의 ‘제로섬’ 게임이지만, 인생은 ‘논제로섬’ 게임이다. 한 개인의 인생만 그런 게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드니 빌뇌브의 영화 <컨택트>(2017)가 잘 보여주듯이 논제로섬 게임에서는 양측의 손과 실을 합쳐 플러스가 될 수도 있고, 손과 실을 합쳤을 때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다.

다시 몸의 <개미와 베짱이>로 돌아가자. 이 소설에서 톰의 불행이 조지의 행운이 아닌 것처럼, 톰의 행운 또한 조지의 불행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조지의 인생과 톰의 인생은 독립 변수이다. 

톰이 위기에 닥치거나 위기에 닥친 것처럼 위장했을 때, 그 행동이 조지의 인생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조지가 화를 내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그는 톰이 얻은 것만큼 자신이 잃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가 잃은 것은 없다. 그는 여전히 “쉰 살이 되면 3만 파운드를 받게 된다”. 그 돈은 그가 25년 동안 월급의 3분의 1일을 저축하면서 애써 모은 돈이다. 그의 3만 파운드는 톰이 하루아침에 유산으로 물려받은 50만 파운드와 전혀 상관이 없다.

거듭 말하지만 ‘인생은 아무도 모른다’. 때때로 기여와 보상은 반비례한다. 확실성이 행복을 가져다줄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마치 <개미와 베짱이>의 톰과 조지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탈렙의 ‘행운에 속으면 안 된다’는 말을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 사실 그가 말하는 행운은 영어로 ‘luck’이 아니라 ‘randomness’, 즉 ‘무작위성’이다. 그의 주장은 ‘인생은 알 수 없지만 그렇다고 무작위성에 맡겨서도 안 된다’는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그는 거기에 “남에게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하지 마라”라는 경구를 더한다.

윤정용 <문학평론가·칼럼·독자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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