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두견새(子規) 울 즈음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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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두견새(子規) 울 즈음이면
  • 김상구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2.04.07 08: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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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홍성·예산 인근에는 과수원이 많아 사과, 배를 비롯한 과실수의 꽃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꽃이 만개(滿開)할 때가 마침 보름과 겹쳐지면, 과수원 달밤의 정취는 지나가던 객(客)들의 발길을 붙든다.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제/ 일지 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라고 읊었던, 고려 후기 문신 이조년도 이와 유사한 정을 느꼈으리라. 삼십여 년 전 홍성에 처음 왔을 때 산 허리에 하얗게 피어 있는 꽃들의 모습을 밤이면 종종 회상(recollection)하곤 했었는데, 요즘 다른 용도로 전환된 과수원을 바라보며 그냥 뒀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효석은 《메밀 꽃 필 무렵》에서 ‘산 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라고 달밤의 애상(哀傷)적인 정취(情趣)를 묘사하고 있다. 꽃을 감상한다는 것은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니 보는 이의 마음이 중요하다. 누군가는 막걸리나 와인 한잔을 하며 달밤의 정서를 만끽하고 싶어질는지 모른다. 거기에 두견새마저 울어준다면 그 정취는 배가(倍加)될 것이다. 그러나 꽃은 예쁜 모습을 보여주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시든다. 며칠밖에 피지 못하는 꽃을 보고 시인 묵객들은 그것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여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 했다. 권력도 그렇다는 말일 것이다. 권력뿐만 아니라 인간도 태어나면 언젠가 꽃이 지듯이 죽는다. 꽃과 권력이 오래가지 못하는 것처럼 인생도 영원하지 못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고대 로마에서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개선장군 뒤에서 노예를 시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를 큰소리로 외치게 했다고 한다. 오늘은 힘이 있겠지만 언젠가 죽으니 겸손하게 행동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죽음이 있기에 삶도 있고, 삶의 의미도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죽음은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꽃은 피고 지는 것을 반복하지만, 인간의 죽음은 이것과 같지 않다. 인간은 한번 가면 돌아오지 못한다. 인간은 지는 꽃을 보고 무상함을 느낀다. 이것을 반복하는 봄이 무심해 보이기까지 한다. 화사한 복사꽃이 피는 봄이 기다려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무심한 봄을 느끼는 사람은 양가감정(ambivalence)을 느끼는 사람일 것이다. 태어나고, 꽃이 핀다는 것의 뒷 면에는 죽음의 DNA가 함께 내재 해 있기 때문이다. 귀밑머리가 하얗게 변하니 지는 꽃의 애상함이 뒤따라온다.

죽음은 근본적으로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사자의 입속에 빨려 들어가는 가젤(gazelle)의 뒷다리도 살려고 끝까지 발버둥 친다. 태어나는 모든 것은 살려는 의지가 내재해있기에 죽음이 두려울 수밖에 없다. 진시황(秦始皇)도 죽지 않으려고 불로초를 구하러 먼 곳까지 사람을 보냈지만, 오십을 넘기지 못했다. 인간은 죽음이 두려워 신을 섬겼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남의 일로만 여기고 싶어 한다. 남의 일로 여기던 죽음이 질병 등으로 나에게 다가오면 아니라고 부정하고, 화를 내다가 마침내 수긍하는 단계를 거친다. 확실히 죽었다가 살아온 사람이 없으니 죽음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장님 코끼리 만지는(盲人摸象)’ 식이다. 종교는 사후세계를 상정한다. 그러나 공자는 삶도 모르는데 죽음을 어찌 알겠느냐라고 말한다. 그래서 유교에서는 내세(來世)가 없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인륜이 중요하다. 죽음을 멀리하던 유교가 지배했었던 우리 사회에서, 죽음학 강좌를 종종 만나볼 수 있다. 죽음이 무엇인지를 일부라도 알아보려는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모르는 곳을 급히 찾아간 사람은 그곳이 낯설어 마음이 편치 않을 수 있다. 죽음을 잘 준비한 사람은 그것을 마음 편하게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우리 곁을 떠난 이어령 선생은 죽음을 준비하여, 마음 편하게 맞이했다고 하니 그의 인품을 되새겨 보게된다. 고승(高僧)들은 이승을 떠날 날을 알고, 그에 대비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고승들이 가장 택하고 싶어 하는 죽음의 방법이 천화(遷化)라고 법정 스님은 생전에 말한 적이 있다. 저세상으로 갈 때가 되면 야밤에 깊은 산중으로 있는 힘을 다해 올라가 나뭇잎에 쓰러져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이다. 시신은 자연 속으로 돌아가 자연의 일부가 될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일 것이기에 고승들이 택하고 싶어 하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나 같은 범부(凡夫)야 살고 죽는 일을 자기 마음대로 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적어도 언젠가 죽는다는 생각을 늘 마음속에 두고 살아야 삶이 더 의미 있지 않을까 싶다.

이화에 월백 할 즈음이면 멜랑코리한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차에 틀어 놓고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달밤에, 홍성·예산의 과수원 옆을 흥얼거리며 지나가고 싶다. 차창 밖에서 두견새가 울어준다면 봄밤의 더 없는 호사(豪奢)가 되지 않을까.


김상구 <청운대학교 영미문화학과 교수·칼럼·독자위원>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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