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것·방치된 폐건축물에 대한 군산의 새로운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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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것·방치된 폐건축물에 대한 군산의 새로운 시선
  • 취재=한기원·백벼리 기자
  • 승인 2022.05.01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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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원도심 근대문화유산 어떻게 보존·관리할까 〈3〉

일제 수탈의 근거지였던 군산항, 역사의 현장으로 복원·재조명
군산 원도심, 근대역사의 아픈 생채기들 구석구석에 남아 있어
여행지로 각광 받는 군산, 근대역사문화유산이 잘 보존·활용돼
원도심 활성화, 근대건축물을 자원으로 활용하자는 사업 성공해

 

옛것의 중요성에 대한 시선은 현재의 입장에서는 관점에 차이가 분명히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옛것과 옛 폐건축물이라는 것은 역사·문화·관광자원으로의 측면 뿐만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내력과 추억, 자긍심 등을 담고 있다. 유럽의 많은 국가들이 1000년이 넘도록 중세시대 도시 모습을 완벽하게 유지하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결국은 현존하는 옛 건축물을 무조건 없애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교훈을 던져준다는 점이다.

식민지 시대의 아프고 쓰라린 상처가 기억된 도시, 조선의 쌀과 물자를 일본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 건설된 계획도시 군산은 일제강점기 1만 명이 넘는 일본인들이 살았으나 한강 이남에서 최초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날 정도로 민초들의 삶과 저항정신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곳이다. 이러한 군산에는 일제강점기의 근대건축물들이 즐비했다. 하지만 군산시는 새로운 시선으로 근대건축물의 공간을 바라보았다. 침략과 수탈이란 치욕적인 과거의 공간에서 독립운동과 농민저항운동 등을 통한 미래지향적인 역사의 공간으로 확장의 필요성을 미래지향적 시선으로 바라봤던 것이다. 특히 낡은 건물들을 허무는 것이 아니라 낡은 건물들에 담긴 스토리와 시대의 흔적 등을 복원해 역사와 문화, 교육의 장으로 활용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잔재 건축물을 보존하는 것에 대한 반발도 있었지만 현재는 근대역사문화교육의 장이자 체험관광의 명소로 떠오르면서 군산은 전국에서 근대역사문화를 기반으로 한 원도심 도시재생사업의 성공사례로 꼽히고 있다. 이 모든 결과는 미래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과 시선의 차이일 뿐이며, 지역의 지도자가 낡은 근대건축물에 대해서 어떠한 결단을 내려 어떠한 일을 어떻게 추진하느냐에 따라 지역발전을 위한 성패를 좌우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 아픈 근대역사, 역사 현장으로 복원·재조명
한마디로 군산은 항구도시 특유의 혼합문화로 가득한 근대역사문화 도시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국내 항구 도시들은 문을 활짝 열었다. 부산, 원산, 인천, 목포, 진남포, 마산 그리고 군산 순으로. 1899년 5월 1일이 군산의 개항일이다. 하지만 군산은 다른 항구들과는 성질이 좀 달랐다. 오직 쌀 수출만을 근간으로 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충청과 호남 일대의 쌀이 이곳을 통해 일본으로 실려 나갔다. 그래서 일본 상공인들이 모이게 됐고 인구의 50%가 일본인으로 채워졌다. 그렇게 군산은 일본인의 도시가 됐다. 당시의 수많은 흔적들은 수많은 공간으로 남았다. 현재 원도심 지역의 건물 가운데 약 20%가 일제시대에 지어진 것이다. 일제 수탈의 근거지였던 군산항. 오직 상흔으로 기억된 채, 침묵의 역사로 존재해 왔던 근대 역사가 아픔을 드러내고 역사의 현장으로 복원·재조명되기 시작했다. 

역사가 전해주는 말을 통해 당대 삶의 존재를 확인하고 이해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모든 역사는 삶의 기록이다. 침묵해 잊혀질 수 없는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됐다. 일제는 쌀을 쉽게 운송하는 신작로를 닦았는데, 그것이 바로 전주와 군산을 잇는 ‘전군가도’다. 일제는 군산 옥구의 들판을 반듯한 경지로 만들고 농장화를 추진해 억압과 수탈의 강도를 높인다. 봄에 벚꽃이 만개하는 전군가도는 바로 한민족을 억압하는 수탈의 길인 것이다. 째보선창 인근에는 옛 군산세관이 자리하고 있다. 근대 문화유산 중 보존이 가장 잘 된 건물로 1990년대까지 실제 세관 건물로 사용됐다. 화강암 기초 위에 붉은 벽돌로 지어진 건물로 국내에 현존하는 서양고전주의 3대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힌다. 번영로를 따라 옛 군산역으로 돌아들어 원도심의 대로였던 중앙로와 영동상가로 방향으로 발길을 잡는다. 개항 이후 일제는 군산에 목포영사관 분관을 설치하고, 1906년 군산이사청이 개설되면서 군산을 장악한다. 이후 일본인들은 토지를 확보하고 부를 축적해 나갔다. 영동상가는 당시 군산 최고의 번화가로 상점들이 들어선 거리다. 일본인들은 이 거리를 행정구역상 영정이라는 표현의 일본식 발음으로 사카에마치라 불렀다. 하지만 조선인들은 송방거리, 송방골목이라고 불렀다. 당시 이곳에서 상가를 운영하는 조선인들  중에 개성상인이 다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당시 군산에는 1200여 명의 화교도 거주하고 있었는데 대규모 무역상은 영화동 일대에서 포목상을 운영했고, 영동상가에는 식료품과 잡화 취급 상점 등을 운영했다. 영화동을 지나 월명산까지 이르는 원도심에는 근대역사의 아픈 생채기들이 구석구석에 남아 있다.
 

■ 근대건축물을 활용, 원도심을 활성화한 군산
근대문화의 이해와 일제 강점기 수탈의 역사로써 군산은 해석되고 이해된다. 서구에서 근대의 상징을 자유와 시민계급의 출현으로 본다면, 우리 근대사는 개화의 시점에서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해방까지로 볼 수 있다. 1900년대 초부터 1945년까지 일제 강점기 시대의 역사가 우리의 근대역사다. 그래서 근대의 유산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는 곳이 군산이다. 1899년 개항한 군산항은 일본의 한반도 침략 발판이 되며 수탈항으로 변모한다. 군산이 고향인 근대 풍자문학의 대가인 소설가 채만식은 군산의 내항을 소설 ‘탁류’의 배경으로 그렸다. ‘탁류’는 금강의 물길이 서해로 합류하는 군산항의 째보선창을 배경으로, 개항 이후 일제의 혹심한 수탈의 통로로 변모한 군산항을 배경으로 1930년대 당시의 사회상을 풍자와 냉소로 엮은 장편소설이다. 군산항을 기점으로 반경 1km 안에 밀집한 일제 강점기 건축물들과 적산가옥들은 원형 그대로 쉼터가 되기도 하고 박물관, 숙소, 카페, 밥집, 서점으로 변신해 우리를 맞는다. 이곳이 바로 군산 근대역사문화 거리다. 1899년 각국 조계지로 개항한 이후 군산항 주변엔 군사부청사, 미곡검사소 등 근대 양식의 건물이 많이도 들어섰다. 군산의 조선은행, 미즈상사, 대한통운 창고 등을 보수·복원해 미술관, 건축관, 박물관 등으로 만들었다. 영화동, 월명동 일대엔 170여 개 근대 양식의 건물과 적산가옥이 남아 있다. 군산이 여행지로 각광 받는 배경에는 활발하게 보존·활용되고 있는 근대문화유산이 있기 때문이다. 군산은 일제 강점기 미곡 수탈의 현장이었다. 일제는 전국 각지에서 앗아온 쌀을 군산항을 통해 조선 밖으로 빼내 갔다. 1920~30년대 ‘식민항구도시’ 군산항 인근에는 세관, 은행, 쌀 창고, 무역회사, 곡물검사소, 일본인 적산가옥 등이 속속 들어섰고, 그 건물들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군산에서는 2000년 무렵부터 이러한 근대건축물들을 원도심을 활성화하는 자원으로 활용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1962년 건축법 제정 이전에 지어진 건축물을 ‘근대문화유산’으로 부르기로 했다. 군산시는 ‘근대문화도시 조성사업’에 나섰고, 2008년 ‘근대산업유산예술창작벨트화사업’(문화체육관광부), 2014년에는 국토교통부의 ‘도시재생선도사업’에 선정되는 등 중앙정부가 지원하는 사업 대상지로 선정되면서 본격적으로 사업을 진행하게 됐다. 이러한 노력으로 현재 군산 원도심 일대에는 많은 근대문화유산이 복원됐다. 장미동에는 군산근대역사박물관과 진포해양공원이 문을 열었고, 쌀 창고는 장미갤러리와 장미공연장으로, 조선은행 군산지점은 근대건축관으로, 일본 무역회사 미즈상사 건물은 카페로 활용되고, 월명동 구영5길을 중심으로 고우당을 비롯해 일본 적산가옥을 리모델링한 숙소, 식당, 카페 등이 밀집해 있다.

이렇듯 군산은 우리나라에서 근대역사문화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도시다. 일제 강점기 수탈의 전진기지로 활용됐던 지역의 일제 잔재물을 보존할 필요가 있느냐는 반발도 있었지만 일제 강점기 건축물을 고집스레 지켜내면서 근대역사문화 유산으로 활용해 관광도시로 자리 잡는 계기를 마련한 도시다. 빛바랜 근대역사문화의 기억들이 우리를 일상으로 불러내 사람들을 군산으로 끌어들이는 힘의 가치와 의미가 원도심의 골목골목 풍경들이다. 이제 우리는 그곳, 군산을 찾아 과거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 여행자가 됐다.

일제강점기 쌀 창고는 장미갤러리와 장미공연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일제강점기의 쌀 창고는 장미갤러리와 장미공연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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