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한의 중심도시에 ‘충남 행정수도’ 새로운 터전 일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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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의 중심도시에 ‘충남 행정수도’ 새로운 터전 일구다
  • 취재|글·사진=한관우·한기원 기자
  • 승인 2022.08.14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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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마을공동체 스토리 〈2〉 - 홍북 석택리 석교(돌다리)마을

홍주일보사는 충남미디어포럼과 2022년도 충청남도지역언론지원사업(연합사업)의 지원을 받아  마을공동체의 의미와 가치, 역사와 문화, 함께 누리는 행복한 삶, 함께 만드는 희망이야기를 통해  어제와 오늘을 돌아보고 내일을 톺아본다. 이를 통해 더불어 사는 삶의 터전, 인간답게 살고 싶은 사람들, 행복하고 희망이 가득한 공동체 마을의 스토리를 홍주신문에 10회에 걸쳐 소개하고 영상으로도 담는다.  <편집자 주>

홍북 석택리 석교마을 전경.

홍북 석택리는 석교(돌다리)와 택리(직절)마을이라는 지명이 근원을 이루는 곳이다. 석교(돌다리)마을은 홍북읍소재지인 대동리 대지동마을과 연접해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석교리, 갈산리, 대지리 각 일부와 덕산군 덕산면 수촌리 일부를 병합해 석교와 택리의 이름을 따서 ‘석택리’라 지명을 정하고 홍성 홍북면에 편입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석택리의 으뜸 마을인 ‘석교(돌다리)마을’은 큰말이나 작은말에서 서낭댕이로 갈 때 건너던 돌다리가 있었다고해서 ‘돌다리마을’로 불린다. 돌다리의 모양은 넓은 바위를 두 개 올려 그 위에 돌판을 깔았던 형태였으나 새마을사업이 벌어지면서 경지정리를 하고 길을 정비하고 넓히는 과정에서 당시에 땅속에 묻힌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마을의 이름(지명)은 여전히 ‘돌다리마을’로 남아 있다. 두 단계 정도 되는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돌다리였지만 ‘돌다리마을’은 ‘석교(石橋)’라는 지명의 근원이 되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돌다리는 1970년대 경지정리를 하면서 아쉽게도 땅 속에 묻히게 됐는데, 마을 사람들은 돌다리를 건너다니고 도랑에서 놀던 추억 때문에 돌다리가 사라진 점을 무척 서운해 하고 있다. 마을의 명물이었던 돌다리를 젊은 친구들은 알지를 못하고 마을 어르신들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어 마을 주민들은 땅속에 묻힌 돌다리를 찾을 수 있다면 복원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석택리 일대는 낮은 야산지대로 넓은 농지가 형성돼 있고 나지막한 골짜기마다 집들이 모여 있다. 석교(돌다리)마을은 큰말, 작은말, 암탉골, 참새골의 재미있는 이름을 갖고 있다. 암탉골은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으로 밖에서 보면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지어졌고, 참새골은 매가 참새를 좋아하니까 매를 달래기 위해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석교(돌다리)마을도 택리(직절)마을과 마찬가지로 19세기 말 일제의 식민지 통치체제 속에서 봉곤제도의 모순과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에 반하며 봉기한 동학농민군은 특히 전라도와 충청도 일대에서 세력을 규합했고, 갑오년 대규모 항쟁을 벌인 끝에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택리(직절)마을의 김상현, 김상림이 동학농민군에 참여 출가했으며, 석교(돌다리)마을에 살았던 동학농민군 부자도 도피했다가 결국은 관군에 잡혀 홍주성으로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석교마을 입구 안내 표지석.
석교마을 입구 안내 표지석.

■ 한산이씨 ‘400년 전통’ 홍북면장 셋 배출 
돌다리마을에 세거하는 대표적 성씨로는 ‘한산이씨’가 있다. 입향조로 알려진 이덕영(李德塋)이 1600년대 천안에서 이곳으로 왔다고 한다. 석교마을의 한산이씨는 인제공파(麟薺公派)의 지파인 광목공파(光牧公派)의 자손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덕영은 이담(李潭)의 아들로 밀양박씨와 혼인하였고 관직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를 지냈으며, 묘소는 석교에 있다. 그의 아들 이학연은 파평윤씨 윤기택의 딸과 혼인하였고 사마시에 급제한 후 교관을 지냈으며, 묘소는 아들 이맹직과 함께 천안에 있다. 다만 이맹직의 처 밀양박씨 박세채의 딸의 묘소는 석교마을에 있다. 이렇듯 부인 밀양박씨의 묘만 석교에 둔 것으로 봐 한산이씨 입향 이전에는 석교마을에 밀양박씨가 터를 잡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석교(돌다리)마을에는 한산이씨와 함께 경주최씨가 11대째 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밀양박씨, 의령남씨 등 여러 성씨가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편 석교(돌다리)마을에는 고사했다가 살아난 정자나무가 있다. 돌다리 작은말에는 400년 이상 된 크고 오래된 정자나무가 있다. 15~16년 전 남아 있는 사진을 보면 나무 기둥만 있고 잎사귀가 없이 고사했다.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이곳에 길이 생겨 정자나무 바로 앞을 시멘트로 포장해서 나무가 죽었는데, 신기하게도 지금의 정자나무는 푸르고 무성한 나뭇잎을 자랑하며 마을의 수호수 역할을 하고 있다. 

마을 어르신들의 할아버지가 어릴 때도 정자나무 크기는 지금 그대로 였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정자나무 밑에 모여 무더운 여름도 나고 소통을 하곤 했다. 김 매고 더위에 지칠 때면 정자나무 밑에 밀방석을 깔고 앉아 더위도 식히고 푸짐한 음식을 나누던 의미 있는 장소다. 이렇듯 석교(돌다리)마을 사람들은 평온하고 화합을 잘하는데, 많은 인물들이 사회에서 큰 역할을 한 것을 자랑스러워 한다. 

이 마을은 3대 홍북면장을 배출했다. 구항·서부·홍동·홍북면장을 지내고 재선 홍성군의원, 마을 노인회장과 홍주향교 전교를 지낸 이태준 면장, 구항·홍북면장을 지낸 이금원 면장, 홍북면장과 홍성군행정과장·의회사무국장 지낸 오인섭 면장이 그 주인공이다. 

또 순경으로 출발 경찰의 꽃이라는 총경까지 승진, 부여·공주경찰서장을 지내고 현재 충청남도자치경찰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있는 이시준 상임위원(사무국장), 오준석 현 홍성군의회 사무국장, 정의환 예비역 육군장군, 공군파일럿 출신의 박수용 기장 등을 비롯한 공직자와 교사 등을 특히 많이 배출한 마을로 꼽히고 있다. 


■ 망국재, 고종 승하하자 ‘망곡(望哭)했다’
‘망국재’는 택리(직절)과 석교(돌다리)마을의 경계로 나지막한 고갯길이다. 이 고개는 고종황제가 승하하자 마을 사람들이 모두 산꼭대기에 올라가 ‘망곡(望哭)’하였으므로 ‘망곡재’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그 산자락은 평평하게 다져진 모양으로 여러 사람이 모여 있을 수 있는 곳으로 ‘봉화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그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지만 같은 홍북의 대인리에서 전해지기를 바로 보이는 ‘망국재’ 산꼭대기에서 불을 피우며 서로 연락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으로 볼 때 ‘봉화대’가 있었을 가능성이 추정되는 대목이다. 평평하고 넓게 다져진 자리의 모양을 한 땅이라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을 수 있을만 했던 터였다. 바로 이곳에서 충남도청 주진입도로 개설시 환호유적이 발견되면서 이런 가능성에 대한 추론이 예견되는 곳이다. 

이곳 ‘망국재’ 일대에 대해 문화재발굴조사 당시 문화재전문가들은 ‘마한 54개 소국 중 ‘목지국’과 ‘감해비리국’의 수도였거나 중심도시의 집단주거지였음이 분명하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결국 옛 도시의 수도로 추정되는 중심도시였던 땅에 ‘충남의 행정수도’가 자리한 셈이다. 그만큼 가치와 의미가 있는 곳이라는 진단이다.

망국재 인근의 ‘백절’이라 부르는 곳에서는 절터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지만 실제로 옛날 기왓장이 많이 나왔다는 증언도 있기 때문에 ‘감해비리국’의 수도였다는 추론에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는 ‘망국재’ 아래로 ‘서낭당’이 있어 매년 정원대보름에 서낭당에 가서 제사를 지냈다고 하나 지금은 없어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또한 돌다리마을에는 망국재 산등성이 큰 말샘에 보통 남자 어른의 키보다도 더 큰 2m 정도의 ‘미럭’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가까운 곳에 ‘백절골’이라는 작은 절이 있었다는 절터가 있어 ‘미륵’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미륵의 모양새를 정확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없으나 대충 사람의 모양을 했으나 특별한 문양을 없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어느 때부터인지 그것 때문에 부정탄다는 소문이 돌아 주민들이 미륵을 길가로 옮겼다고 한다. 버스승강장 근처에 뒀던 미륵은 도로공사를 하면서 주변의 땅에 묻혔다고 전해진다.

또 지금의 반석교회가 있는 언덕의 꼭대기를 ‘삼성댕이’라 불렀는데, 이곳에도 절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또 하나는 이곳 끝에 집이 세채가 있어서 삼성댕이라 했다고도 전해진다. 1974년에 편찬된 ‘한국지명총람’에 따르면 ‘이곳에 삼신당(三神堂)이 있었다고 전해진다’는 기록이 있다. 실제 이곳에서는 기와편 등이 발견되기도 했다. 지금은 교회가 세워지면서 옛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마한의 ‘목지국’이나 ‘감해비리국’의 수도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 바로 ‘석택리 환호취락 유적지’인 망국재다. 이곳은 현재 충남도청신도시와 예산수덕사IC를 연결하는 ‘충남대로’의 ‘홍북터널’이다. 석택리 망국재와 용봉산 사이의 홍북 신경리(자경동·주촌·신리마을), 대동리마을에는 충남도청신도시(충남내포혁신도시)가 조성됐다. 결국 2000년 전부터 사람들이 살아왔던 곳, 마한시대에는 중심도시로 ‘수도’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땅에 ‘충청남도 행정수도’가 새로운 터전을 일구고 있다.

 

<이 기사는 충청남도지역언론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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