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세한도(歲寒圖)와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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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세한도(歲寒圖)와 소나무’
  • 글·창원 이영복(한국화가)
  • 승인 2022.11.11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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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다시 ‘세한도’를 들여다본다〈1〉

풍양 조씨, 안동 김씨 등의 세도 정치에 도전했다가 쫓겨나 제주도로 귀양 간 추사 김정희가 자신의 쓸쓸한 심정을 한 폭의 그림에 담았다. 메마른 둥치를 드러낸 세 그루 소나무에 둘러싸인 초라한 집 한 채. 날씨가 차가워진 뒤에도 변함없이 꼿꼿한 모습으로 작은 집을 둘러싸고 있는 소나무는 절개를 상징한다. 불우한 처지에 놓인 김정희를 끝까지 지켜 주며 북경에서 귀한 책까지 구해 준 제자 이상적을 이 소나무들에 비유했다고 한다. 추사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혼탁한 정치판에서 물러난 김정희는 세상을 한탄하며 글씨와 그림에 깊숙이 몰두하게 된다. 몰락한 자신을 아무도 찾지 않아 가슴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외로움과 분한 마음을 날이 추워진 후에도 변함없는 소나무와 잣나무에 기대어 견디려고 하는 분투가 느껴진다. 조선 후기 최고의 명품 서체로 알려진 추사체는 그렇게 태어난 것이다. <펀집자 주>

세한도(歲寒圖) 김정희(金正喜·1786~1856) 국보 180호.

추사의 ‘세한도(歲寒圖)’는 한 폭의 문인화로서 풍경을 위한 그린 그림이 아니라 사제지간의 고매하고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그리고 쓴 ‘심경화(心境畵)’이다. 국보 180호 이기도 한 이 ‘세한도’를 조선학예의 총화요 문인화의 정수라고 일컬어지고, 현재에 이르러서도 왜 우리를 감동하게 하는가를 네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본다.

‘세한도’는 단순히 한 폭의 그림으로만 이해하여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세한도’가 탄생하게 된 동기와 높은 격조의 예술성과 지금에 전해 오기까지 감동적인 사연이 있어 가슴을 뭉클하게 하기 때문이다. 

추사 김정희(1786~1856)는 명문가에서 태어나 유학에 통달하였고 서화뿐만 아니라 금석학(金石學)의 대가로도 유명하다. 70평생을 서예의 종장(宗匠)으로 군림(君臨), 존경받아온 그가 ‘침계(梣溪)’라는 두 글자를 완성하는데 30년 세월이 걸렸다고 하니 누가 믿겠는가.

사연은 이러하다. ‘침계(梣溪)’는 윤정현(尹定鉉)호다. 추사의 7년 연하로 판서직을 두루 거친 당대의 명망 높던 문신이다. 추사의 영향을 받아 비문에도 밝았다. 추사는 30년 후 두 글자를 완성하고 그 글씨 옆에다 다음과 같은 사연을 기록했다.

“이 두 글자를 부탁받고 예서로 쓰고자 했으나 한비(漢碑)에 첫 글자가 없어서 함부로 만들어 쓰지 못하고 마음속에 두고 잊지 못한 것이 이제 30년이 지났다.

요즘 북조금석문(北朝金石文)을 많이 읽고 있는데 모두 해서와 예서의 합체로 쓰여있다.

수당(隋唐)의 진사왕(陳思王)이나 맹법사(孟法師)와 같은 여러 비(碑)는 더욱 그렇다. 그래도 그 뜻을 본떠 이를 썼으니, 이제야 부탁을 들어주고 오래 묵었던 뜻을 쾌히 갚을 수 있게 됐다. 추사도 평소 서론(書論)에서 글씨 쓰는 법을 한비(漢碑)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해온 만큼 전범(典範)이 되는 한비에 없는 글씨는 제멋대로 지어서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요즘말로 프로정신이다. 

대강대강 적당히 넘어갈 수가 없었고 졸속을 피한 것이다. 자기 분야에 대한 투철한 장인정신의 정화(精華)가 아닐 수 없다.

“내 평생 천 자루의 붓이 몽당 되었다”고 술회하기도 했으니 노력도 대단했다. 

제자인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1804~1896)은 추사보다 18세 연하의 중인(中人)이었다. 이상적은 중국어 역관이 되어 중국을 12번이나 드나들며 스승이 닦아놓은 인연의 저명한 문사들과 깊이 교유하고 학문과 시문을 논하기도 하였다. 그는 특히 시로 크게 명성을 얻어 중국에서 간행되기도 하였다. 이상적은 벼슬길도 순탄하여 1862년에는 임금의 특명으로 종신토록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세한도의 화발(畵跋).

제자 이상적이 여러 해를 두고 중국(淸)을 드나들 때마다 계복(桂馥)의 ‘만학집(晩學集)’ 등 귀한 책자를 수집 적소(謫所)의 스승 추사에게 다음과 같은 간결한 서한과 함께 보내니 이로써 ‘세한도’ 탄생의 동기가 되었다.

“겨울입니다. 적소의 겨울은 유난할 터인데,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저립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아픔이 고독이라 했습니다. …(중략)… 이번에 연경의 고서점 거리를 걷다가 눈에 번쩍 띄는 것이 있어 구했습니다. 저는 그 책을 손에 들고 기뻐하실 스승님의 모습 떠올리며 길거리에서 혼자 빙그레 웃었습니다. 아무쪼록 스승님, 이 책 읽으시고 연구하시면서 적소의 무료함을 달래신다면 저에겐 더할 수 없는 기쁨이 될 것입니다”라고 쓰고 동봉했다.

우선 이상적이 보낸 서찰과 책자를 받아본 추사의 기쁨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추사가 5년째 유배생활(1884)을 하던 중에 제자 이상적이 선생에게 대하는 한결같은 마음에 감격하여 그림을 그려 화면 위쪽 상단에 ‘세한도(歲寒圖)’라 화제를 쓰고 그림 왼편에 발문을 정성스럽고 엄정하게, 작품을 그리게 된 연유를 다음과 같이 ‘해서체(楷書體)’로 썼다.

그대가 지난해에 계복의 만학집과 운경(惲敬)의 ‘대운산방문고(大雲山房文藁)’ 두 책을 부쳐주고, 올해 또 하장령(賀長齡)이 편찬한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을 보내주니 이는 모두 세상에 흔한 일이 아니다. 

천만리 먼 곳에서 사온 것이고, 여러 해에 걸쳐서 얻은 것이니, 일시에 가능했던 일도 아니었다.

지금 세상은 온통 권세과 이득을 쫓는 풍조가 휩쓸고 있다. 그런 풍조 속에서 서책을 구하는 일에 마음을 쓰고 힘들이기를 그같이 하고서도, 그대의 이끗을 보살펴줄 사람에게 주지 않고 바다 멀리 초췌하게 시들어 있는 사람에게 보내는 것을 마치 세상에서 잇속을 쫓듯이 하였구나!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이 말하기를 “권세과 이득을 바라고 합친 자들은 그것이 다하면 교제 또한 성글어 진다”고 하였다. 그대 또한 세상의 도도한 흐름 속에 사는 한 사람으로 세상풍조의 바깥으로 초연히 몸을 빼 내었구나 잇속으로 나를 대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아니면 태사공의 말씀이 잘못되었는가?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된 다음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 수 있다(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歳寒然後知松柏之後凋)”고 하셨다.

소나무, 잣나무는 본래 사계절 없이 잎이지지 않은 것이다. 추운 계절이 오기 전에도 같은 소나무, 잣나무요, 추위가 닥친 후에도 여전히 같은 소나무, 잣나무다. 그런데도 공자께서는 굳이 추위가 닥친 다음에 그것을 가리켜 말씀하셨다.

이제 그대가 나를 대하는 처신을 돌이켜보면, 그 전이라고 더 잘한 것도 없지만, 그 후라고 전만큼 못한 일도 없었다. 그러나 예전의 그대에 대해서는 따로 일컬을 것이 없지만, 그 후에 그대가 보여준 태도는 역시 성인에게도 일컬음을 받을만한 것이 아닌가? 성인이 특히 추운 계절의 소나무, 잣나무를 말씀하신 것은 다만 시들지 않는 나무의 굳센 정절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역시 추운 계절이라는 그 시절에 대하여 따로 마음에 느끼신 점이 있었던 것이다.
 

침계(梣溪) 김정희 종이에 수묵 42.8×122.7cm 간송미술관 소장.

아아! 전한(前漢)시대와 같이 풍속이 아름다웠던 시절에도 급암(及黯)과 정당시(鄭當時)처럼 어질던 사람조차 그들의 형편에 따라 빈객(賓客)이 모였다가는 흩어지곤 하였다. 하물며 하규현(下邽縣)의 적공(翟公)이 대문에 써 붙였다는 글씨 같은 것은 세상인심의 박절함이 극에 다다른 것이리라. 슬프다! 완당(阮堂)노인이 쓰다. 

스승의 <세한도>를 받아본 이상적은 곧 다음과 같은 답장의 글을 올렸다.

<세한도> 한 폭을 엎듣려 읽으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그다지도 제 분수 넘치는 칭찬을 하셨으며, 그 감개 또한 그토록 진실하고 절실하셨습니까?

아! 제가 어떤 사람이기에 권세와 이득을 따르지 않고 도도히 흐르는 세파 속에서 추연히 뻐져 나올 수 있겠습니까? 다만 구구한 작은 마음에 스스로 하지 않을 내야 아니할 수 없었을 따름입니다. 하물며 이러한 서책은, 비유컨대 몸을 깨끗이 지니는 선비와 같습니다. 결국 어지러운 권세와는 걸맞지 않는 까닭에 저절로 맑고 시원한 곳을 찾아 돌아간 것 뿐입니다.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이번 사행(使行)길에 이 그림을 가지고 연경에 들어가 표구를 해서 옛 지기(知己)분들께 두루 보이고 시문을 청하고자 합니다. 다만 두려운 것은 이 그림을 사람들이 제가 참으로 속세를 벗어나고 세상의 권세과 이득을 초월한 것처럼 여기는 것이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과당하신 말씀입니다.(추사 제발문, 이상적의 답서-오주석 주해 글 인용)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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