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시각으로 암울한 노동과 민중의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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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시각으로 암울한 노동과 민중의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다
  • 정세훈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3.04.20 08: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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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운동가 출신 심산의 시집 〈식민지 밤노래〉

“당신은 이 시집에 실려있는 노래들을 통해 자신의 조국이 식민지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아왔던 한 청년의 고통스러운 정신적 궤적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캄캄했던 어둠의 세월을 때로는 도피하고 때로는 부딪히고 때로는 피를 흘리면서 살아온 그가 어떻게 해 ‘버릇없는 애새끼’로 변해갔는지를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날카로운 귀를 갖고 있다면, 그 청년이 아직도 채 다 떨쳐내지 못한 길들여진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다는 것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너그러운 눈을 갖고 있다면, 식민지의 밤에 불리워진 이 보잘것없는 노래들을 통해서도 그 밤을 꿰뚫고 달려오는 저 찬연한 새벽빛의 가슴 벅찬 아름다움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 청년은 아마 몹시도 행복해할 것이다”

1989년 1월 도서출판 세계가 고 박래전 유고시집 <반도의 노래>에 이어 ‘세계시선’ 두 번째로 학생운동가 출신 심산 시인의 시집 <식민지 밤노래>를 펴냈다. 앞에 인용한 문장은 심산 시인이 발문이나 해설 대신 자신이 직접 ‘어느 무명시인의 참회’라는 제목으로 쓴 후기의 일부다. 우리가 이 문장에서 발견할 수 있듯이, 시인은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 땅을 아직도 일본은 물론 미국 등 외세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지 못한 상황으로 인식하고 있다. 시집에서 외적으로는 해방됐으나 정치, 자본, 가치관, 얼 등 내적으로 해방되지 못한 식민지 시각으로 암울하기 그지없는 이 땅의 노동과 민중의 현실을 바라보고 이를 극복하고자 했다. 시집에 담긴, 시 ‘여의도’의 일부를 함께 음미해 보자.

-전략- /국회의사당은 알아들을 수 없는 합창으로 배움을 내뿜었고/전경련회관의 창문으로 이따금/돈을 세는 침 바른 손가락들이 삐죽삐죽 삐져나왔으며/음탕한 아파트들은 한 층 더 키를 높혔다/50년대, 불바다를 심고 다니던 미제전투기들이/들켜버린 현장범처럼 쑥스러운 머리를 자꾸 주억거리긴 했으나/ -중략- /등짐을 진 잡역부는 떨어져 내리기만 했다/떨어져 바숴져서야 숨겼던 끓는 피를 내비치곤 했다/여의도여, 너 바벨이여 소돔이여/ -중략- /어깨 단단히 엮은 기름 낀 근육, 그 포크레인 삽날마저 볼 수 있다면/그 힘의 오래 묵혀둔 정당성마저 볼 수 있다면/그 역동성마저 볼 수 있다면/결코 너희 맨션의 철근만이 강하다 못할 것이다/바다 건너 종주국이 든든하다고만은 못할 것이다/여의도여, 너 가소로운 신화여, 고모라여/이제 네 멋대로 마지막 죽음의 축제에 광란하라/불타 잿더미로 무너져버릴/가소로운 신화여 낯뜨거운 추문이여/여의도여

1961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1980년 한성고등학교와 1985년 연세대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한 시인은 같은 해 자유실천협의회 기관지에 시를 발표하며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식민지 밤노래’를 비롯해, 보고문학 ‘실록 삼청교육대’, 장편소설 ‘하이힐을 신은 남자’, 시나리오 ‘비트’ ‘태양은 없다’ ‘비단구두’, 역서 ‘대부:시나리오와 제작노트’ 등을 출간했다. 또한 산악문학 ‘히말라야의 눈물’ ‘산과 역사가 만나는 인문산행’ 등을 펴냈다. 2005년 ‘한국 초모랑마 휴먼원정대’ 일원이 돼 등산 사고로 실종된 산악인 박무택 등의 시신 수습을 위해 에베레스트에 다녀왔고 그 기록을 ‘엄홍길의 약속’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현재 산악인이자 산 전문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정세훈 <시인, 노동문학관장, 칼럼·독자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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