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이상만 선생 공적비 제막식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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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 이상만 선생 공적비 제막식 개최
  • 박승원 기자
  • 승인 2023.07.03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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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 출신, 일제강점기 꾸준히 독립운동 실시
광복 이후 공로 인정…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홍성군(군수 이용록)은 지난달 30일 조국의 자주 독립에 공헌한 이상만 선생을 기리기 위해 국가유공자 등을 모시고 독립유공자 이상만 선생 공적비 제막식을 개최했다.<사진>

이번 공적비 설치는 일제강점기 조국을 위해 헌신한 이상만 선생의 숭고한 애국 정신이 후손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도록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해 진행됐다.

독립운동가 이상만 선생은 지난 1884년 홍성군에서 출생해 1919년 3·1독립운동 발생 직전부터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했고 1945년 광복 이후에도 우리나라 국민의 안전과 재산 등을 지키기 위해 제반 업무 등을 처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63년 김복한·이설 선생과 함께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됐다.

이날 행사에는 독립운동가 이상만 선생의 공적 소개, 내빈 축사, 제막식, 기념촬영 등으로 거행됐다.

이용록 홍성군수는 “조국 광복과 우리나라 발전에 기여한 대한민국의 영웅이자 홍성의 영웅인 이상만 선생에 대해 비록 늦었지만 공적비를 세우게 돼 큰 보람”이라며 “앞으로도 홍성군의 모든 독립·국가유공자들이 존경받을 수 있도록 다양한 보훈사업을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독립운동가 이상만 선생 공적비】

“이상만 선생은 1884년 1월 5일 충남 홍성군 홍성읍 고암리에서 태어났고, 고향인 홍성에서 목회하던 중 1916년 감리교 협성신학교를 졸업하였고 당진으로 전임하여 목회하던 중 1918년 감리교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1919년 3·1 독립운동이 발생하기 직전에 호서지방을 순회하며 3·1 독립운동 선전 활동을 하였으며, 3·1 독립운동 발생 직후에는 조국 독립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했다.

망명 직후 북경에 조직된 독립운동단체인 신대한동맹회의 회장이었던 홍성 출신 박정래에게 영입되어 총무로 활동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표 자격으로 중국 각 성을 순방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과 지원을 요청하는 등 여러 방면으로 활동을 계속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기강에 자리하던 1939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충청도 지역 의원으로 선임되어 의정활동에 참여한 가운데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경으로 이동한 이후 의원으로서 맹활약했다. 한편 그는 1940년 한국 광복군이 창설될 때 총사령부 주계로 임명됐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행정부에도 참여하여 1940년 내무부 산하에 생계위원회가 설치될 때에는 생계위원, 1943년 생활부가 설치될 때에는 생활위원, 1944년 생계설계위원회가 설치될 때에는 생계설계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고 1941년에는 회계검사원 검사원, 1942년에는 회계원 검사관, 1944년에는 회계검사원 검사원장 및 국무위원 임명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게다가 그는 몸담고 있던 한국독립당에서도 1943년 5월 중앙감찰 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그는 중경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거주지인 토쿄에 설립된 신한교회 담임목사로도 활동했으며, 1944년 여화한인기독교 연합회도 창립했다. 1945년 조국 광복이 된 후에도 그는 중국에 남아 주화한교선 무단의 화중구 한교선무단장으로 임명돼 우리 교포의 생명과 재산, 그리고 안전 귀국 등의 제반 업무를 처리하다가 국공내전으로 대만에 건너가 1948년에는 대만한교협회 초대 이사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49년 귀국하여 김구 선생이 기거하던 경교장에 함께 거주하면서 한국독립당 중앙감찰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말년에는 칩거 생활을 하다가 1955년 1월 8일에 소천했다. 그의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 요인 묘역에 안정되어 있으며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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