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와 결혼 앞에서 멈칫하는 젊은이들을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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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와 결혼 앞에서 멈칫하는 젊은이들을 바라보며
  • 김상구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3.07.07 08: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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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가 결혼하면 적어도 2명의 자녀를 낳아야 인구 감소를 막을 수 있다. 아이가 성장하면서 질병이나 각종 사고로 사망할 가능성까지 합한다면 출산율이 2.1명은 돼야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출산율이 이미 2022년 0.78로 떨어졌으며 여러 가지 정황상 계속 하강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출산율이 2.1 이하로 하향한 것이 1984년이니 40년 전부터 인구 감소의 상황에 진입했던 것이다. 이에 반해 죽는 사람의 숫자가 줄어들어 인구가 감소될 것이라는 것을 체감하기 어려웠다. 

출산율이 점점 떨어지자 정부는 저 출산 대책을 수없이 내놓았지만 출산율 하강현상은 지속됐다. 정부가 저 출산 방지 대책으로 300조 원 이상의 돈을 쏟아부어 왔지만 출산율은 한 번도 반등되지 않았다. 지역 소멸 위기를 내세우며 자치단체들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놓고, 출산장려금, 주택보조금, 주민등록 이전 시에 보조금을 경쟁하듯 줬다. 허경영 같은 사람은 아이를 낳는 사람에게 1억 원 이상 돈을 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실현 가능하지도 않고, 실행했을 때 그 부작용은 사회의 발전과 안정을 해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표가 필요한 정치꾼들은 그 말을 배경삼아 포퓰리즘에 가담했다. 

미국에서도 아이를 낳는 여성에게 생활 보조금을 줬더니 학력이 낮은 흑인이나 히스패닉 계의 여성들은 결혼도 하지 않고, 아버지가 다른 아이를 계속해서 낳거나 가정을 꾸리지 않는 폐해가 나타났다. 아이를 낳아 잘 기르라는 보조금이 오히려 정상적인 가정을 꾸리는데 걸림돌이 된 것이다. 대개의 부부는 사랑의 결과로 적정한 수의 아이를 낳고, 기른다. 남이 낳으라고 낳지도 않겠지만 혹여 낳는다 하더라도 원하지 않았던 아이에게 최선을 다할 개연성은 적다.

출산율이 떨어지는 것은 우리나라 현상만은 아니다. 경제개발과 교육수준이 떨어져 있는 아프리카 말고는 대부분의 선진국들이 출산율이 2.0~1.0 사이에 걸쳐있다. 많은 사람들은 출산율이 떨어지면 나라가 존속될 수 있느냐를 먼저 걱정한다. 그러나 교육을 잘 받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고, 소득이 높아지면. 즉 HDI(Human Development Index, 인간개발지수)지수가 높아지면, 낮아지는 출산율은 적정선에서 멈추게 될 것이다. 유럽의 잘 사는 국가들이 이러한 예를 보여준다. 이러한 나라들에서도 출산율이 계속해서 떨어질 때, 국가가 개입해 성공적으로, 지속적으로 출산율을 높였던 예는 없다. 이들 나라들에서 출산율이 다소 높은 이유는 이민자를 받아들여 출산율을 높였기 때문이다. 국가가 개입해 아이를 낳으라고 강요해도 그렇게 되지 않았음을 이들 국가는 보여준다. 

아이들을 낳지 않는 이유를 뚜렷이 알지도 못하면서 많은 돈을 쓰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을 붙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젊은이들에게 아이를 더 많이 낳아야 한다면서 국가의 존속문제를 걱정하고, 연금의 고갈을 언급할 때 젊은이들에게서 공감을 얻어내기는 어렵다. 이것은 노인들의 문제이지 그들의 미래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노년층의 미래를 위해 젊은 너희들이 아이를 많이 낳아야 하지 않겠느냐의 문제로 귀착되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의 결혼연령이 점점 늦어지고 출산율 반등의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좋은 직장을 얻지 못한 젊은이들은 소득이 많지 않고, 이들은 연애와 결혼의 기회마저 얻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출산율이 저조한 것은 가임 여성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연애하고 결혼해 가정을 꾸릴 젊은 남성들이 결혼의 기회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진화 심리학에서는 여성들이 ‘Hypergamy(상승혼)’라 해서 신분 상승의 결혼을 원하기 때문에 학력이 낮고, 소득이 많지 않은 남성과는 결혼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인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지금 결혼 적령기의 30세 안팎의 젊은이들은 우리나라의 이혼율이 급격히 높아지던 때에 어린 시절을 보낸 세대들이다. 이들은 부모 세대들의 행복한 모습보다도 갈등하며, 치열하게 싸우는 부모 세대의 뒷모습을 어느 때보다 많이 보며 성장한 세대다. 그래서 이들은 성 평등과 젠더 갈등에 예민하다. 행복했던 부모의 뒷모습을 보며, 나도 저렇게 살아야지 해도 출산율이 부모의 세대보다는 줄어드는 것이 세계의 일반적 경향이다. 육아가 힘들기 때문이다. 정보 수집에 능한 지금 적령기의 젊은이들은 연애와 결혼의 문턱에서 행복한 삶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스스로에게 자문하고 있는지 모른다, 삶이 혼란하고 힘들수록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일인지 스스로에게 묻지 않는가?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도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삶의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지 밝히려 많은 이야기를 했다. 

‘챗 GPT’가 등장한 정보혁명의 시대에, 노동력을 그렇게 필요로 하지 않는 로봇 시대에 인구감소가 꼭 재앙일 수는 없다. 결혼 적령기의 젊은이에게 얼른 결혼하여 아이를 많이 낳으라는 덕담도 내 욕심 같아 머뭇거려진다.

김상구 <청운대학교 영미문화학과 초빙교수, 칼럼·독자위원>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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