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나의 놀이터는 1급 발암물질 ‘석면 동산’이었다”
상태바
“어릴 적 나의 놀이터는 1급 발암물질 ‘석면 동산’이었다”
  • 취재·사진=한기원·김경미 기자, 자문=예산홍성환경운동연합 신은미
  • 승인 2023.10.07 08: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국내 최대 석면피해지역 충남, ‘석면피해기록관’을 세우자〈5〉
석면과 관련된 일을 전혀 하지 않았지만 10여 년 전 석면폐증 3급을 진단받은 이명수 씨.<br>
석면과 관련된 일을 전혀 하지 않았지만 10여 년 전 석면폐증 3급을 진단받은 이명수 씨.

홍성지역 석면피해자 이명수 씨

■ 어릴 적 뛰어놀던 석면 동산… 소복이 눈 쌓인 어머니 얼굴
홍성 구항면 청광리 소반마을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이명수(64) 씨는 어릴 적부터 달리기를 하면 쉽게 숨이 차는 것을 느끼곤 했다. 요즘도 한 달에 한 번씩 다니는 등산을 할 때면 때때로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낀다. 평소 농사일을 하다가도 이따금씩 갑자기 몸이 피로해지는 것을 느끼곤 한다. 이 씨는 석면폐증 3급이다.

이 씨가 나고 자란 마을에는 석면광산이 있었다. 집에서 걸으면 20분 정도 걸리는 가까운 거리였다. 하지만 그는 석면광산에서 일을 해 본 적이 없다. 그의 아버지 이길성 씨도 석면과 관련된 일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타지에서 이 마을로 시집온 어머니 박옥선 씨는 포대에 담긴 석면을 가져와 동네 어귀에서 마을 아주머니들과 함께 물레질을 했다. 하루종일 물레질을 한 어머니는 마치 눈이 소복이 쌓인 에스키모처럼 온통 하얬다.
 

.
.
.

 

홍성지역 석면피해자 이명수 씨 “석면 관련된 일한 적 없어”
 어머니가 석면으로 ‘물레질’… 툴툴 털면 흩날리던 ‘하얀가루’

.
.
.

 

“어릴 적 살았던 마을에 석면광산이 있었어요. 집에서 걸어서 한 20분 정도 거리였던 것 같아요. 워낙 어릴 때지만 물레질을 하시던 어머니 얼굴에 하얀 먼지가 뽀얗게 쌓여있던 기억이 나고, 또 동네 아이들과 함께 산처럼 쌓여있는 하얀 석면 언덕을 오르내리며 놀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 시절엔 우리 동네 아이들 모두 그렇게 놀았어요.”

10년 전쯤 석면폐증 3급 진단을 받은 이 씨는 그 이후로 조심스럽게 변했다. 미세먼지나 황사가 심한 날엔 외출을 삼가고, 특히 웬만하면 마스크를 착용하는 등 호흡기나 폐에 무리가 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행동이 조심스러워진 것이다.

“석면 일을 전혀 하지 않았지만 그저 석면광산 주변에서 뛰놀고 지냈던 것만으로 석면 질환을 갖게 되니 억울한 마음도 들었어요. 그 당시엔 석면이 몸에 안 좋은 것이란 생각은 하지 못했어요. 물레질을 마친 어머니가 작업하던 곳에서 밖으로 나와 온몸을 털어내면 흩날리던 하얀 먼지들이 또렷이 기억납니다.”

5남매였던 이 씨는 위로 누나가 둘 있었고, 아래로 여동생이 둘 있었다. 광산에서 일을 하지 않았던 이 씨가 석면폐증 3급을 진단받으면서 누나와 동생들에게도 검사를 권했다. 다행히도 일찍이 서울 생활을 했던 큰 누나에게선 석면 질환이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작은 누나와 동생들은 검사를 거부했다.

“석면질환 검사를 하려면 진단이 가능한 특정 병원으로 가야 하는 것도 매우 번거로운 일이고, 아마도 여자들이다 보니 ‘그것 알아서 뭐하냐’하는 마음이 있는 것 같아요. 검사받길 몇 번을 권했지만 잘 안 하려고 하더군요. 큰 누나는 석면질환 진단을 받진 않았지만 최대 수십 년까지 잠복기가 있는 만큼 몇 년에 한 번씩은 검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어요.”

이 씨의 걱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의 부인과 자녀들이 환경적으로 석면에 노출됐었기 때문이다.

“부인은 두말할 것 없고, 두 딸과 막내아들이 석면광산이 있던 마을에서 고등학교까지 나왔어요. 아직은 어리기 때문에 검사조차 하지 않았지만 저처럼 환경적인 노출 경험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석면질환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고, 미안하고 그렇습니다.”

이 씨는 석면질환자들의 보상 규모가 턱없이 부족한 점을 지적하며 개선을 호소하기도 했다.

“석면폐증 2급까지는 2년 동안만 지원을 받고 있는데, 급수별로 회당 지급되는 액수는 달라도 석면폐 1급처럼 계속해서 지원을 해줬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월지급액도 물가상승률 등을 고려해 좀 더 현실적으로 개선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석면피해자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서라면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습니다.”
 

.
.
.

 

홍성지역 석면피해자 박재덕 씨

광천 석면광산에서 일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엮은 책 ‘하얀꽃’을 들고 있는 박재덕 씨.<br>
광천 석면광산에서 일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엮은 책 ‘하얀꽃’을 들고 있는 박재덕 씨.

■ 먹고 살기 위해서 다녔던 광산… 무지했던 시절 무방비로 노출
홍성 광천읍 상정리 덕정마을에 살고 있는 박재덕(79) 씨는 대구 출신이다. 어려서 광천을 찾은 박 씨는 먹고 살기 위해 석면광산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20년이 넘도록 석면광산에서 온갖 일을 도맡아 했다. 주로 막장에서 일을 했다.

그의 아내 김옥선(73) 씨도 석면을 깨는 일인 ‘크라샤’와 석면 원석에 묻은 황토 등 불순물을 제거하는 일인 ‘생꼬’일을 했다. 그렇게 모인 석면은 대전이나 김포에 있는 슬레이트 지붕 공장이나 부산에 있는 국내 최대 규모의 석면공장 등으로 옮겨서 건축 자재로 사용됐다.

그 당시 석면은 ‘불멸의 물질, 기적의 광물’로 불렸다. 그도 그럴 것이 석면은 다양한 특성을 지니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내마모성, 절연성, 내열성, 섬유성, 방부성, 내화성이 뛰어나다. 이런 성질을 활용하기 위해 슬레이트 지붕, 굴뚝 등 건축자재로 사용됐다.

하지만 우리 생활 전반에 걸쳐 있던 석면의 위험성이 세상에 밝혀지기 시작했다. 호흡기를 통해 인체로 들어온 석면이 폐에 박혀 석면폐, 폐암, 난소암 등 각종 질환을 일으키는 발암물질임이 알려진 것이다. 박 씨도 그때까지 석면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
.
.

 

석면광산에서 20년 넘게 일한 박재덕 씨, 석면폐증 3급 진단
석면 일 했었던 아내도 석면폐증 3급… ‘직업성 노출’이 원인

.
.
.

 

“젊어서 어찌하다 광천에 오게 됐고, 자연스럽게 석면광산에서 일을 하게 됐어요. 꼬박 20년을 넘게 일을 했고, 아내도 석면 관련 일을 꾸준히 했죠. 한참 지나고 나서 석면이 몸에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그러다가 기회가 돼서 검사를 했더니 석면폐증 3급이 나오더군요.”

박 씨는 그 시절을 떠올리며 말을 이어갔다.

“그저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했어요. 그걸로 큰돈을 벌지도 못했죠. 농사일과 병행하며 열심히 석면광산에서 일을 했지만 남은 건 석면질환뿐이라니 한탄스럽습니다. 20년 넘게 막장에서 일을 했는데도 석면폐증 3급이 나온 건 어찌보면 다행이지만 한없이 부족한 보상금을 생각하면 차라리 석면폐증 1급 판정을 받았으면 하는 웃지 못할 농담도 하곤 합니다.”

안방 서랍 구석에 보관해 뒀다는 그 당시 월급봉투를 찾다가 쉽게 보이지 않자 그는 멋쩍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이제 와서 그거 찾아서 뭐 한데유~ 이제 죽으면 암것도 아닐꺼.”
 

그 시절 석면광산은 인근 마을주민들의 생계를 책임지던 일터이자, 아이들에게는 놀이터였던 그야말로 생활의 중심지였다. 사진은 1938년경 홍성군 광천읍 덕정마을의 광천석면광산 모습.(사진 제공=홍성군마을만들기지원센터)<br>
그 시절 석면광산은 인근 마을주민들의 생계를 책임지던 일터이자, 아이들에게는 놀이터였던 그야말로 생활의 중심지였다. 사진은 1938년경 홍성군 광천읍 덕정마을의 광천석면광산 모습.(사진 제공=홍성군마을만들기지원센터)
신은미 예산홍성환경운동연합활동가와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소장과 함께 홍성지역 석면피해자들의 인터뷰를 진행중인 모습.
신은미 예산홍성환경운동연합활동가와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소장과 함께 홍성지역 석면피해자들의 인터뷰를 진행중인 모습.

 

<이 기사는 충청남도 지역미디어지원사업이 지원을 받았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