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고 오만한 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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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고 오만한 청춘
  • 윤정용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3.10.12 08: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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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아버지와 아들’이나 ‘엄마와 딸’ 이야기는 익숙하지만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는 사뭇 낯설기만 하다. ‘아빠와 딸’은 그나마 살갑고 가깝게 느껴지지만 ‘아버지와 딸’은 서먹하고 멀게만 느껴진다.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2022)는 바로 그런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다. 소설 속 아버지는 이름만으로 무시무시한 전직 ‘빨치산’이다. 작가 정지아는 신춘문예로 문단에 정식으로 발을 들여놓기 전 《빨치산의 딸》(1990)로 자신의 이름을 알린 바 있다. 작가는 그 사실을 숨기기는커녕 소설을 통해 자신이 ‘빨치산의 딸’이라는 사실을 시쳇말로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누군가의 말처럼 ‘미스터리 같은 한 남자가 헤쳐온 역사의 격랑’을 담고 있다. 전직 빨치산 고상욱은 평생 빨치산이란 이름표를 달고 살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는 빨갱이 인생이 전부였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도 한 사람이었고, 아버지였고, 형제였으며, 이웃이었다. 그걸 아버지가 죽은 후에야 알게 됐다.

빨치산 고상욱의 딸 아리는 스스로 ‘혁명가도 아니고 신념도 없는 주제에 진지하지 않은 것은 참지 못하는 꼰대 같은 어른’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아버지의 동지들은 돌아가며 추모사를 하자 아리는 조문실을 가득 메운 늙은 혁명 전사들 주변으로 이상한 결계(結界) 같은 것을 느꼈다. 조문객들은 들어오려다 뭔가 이상하다 싶은지 머뭇머뭇 발걸음을 돌렸다. 아리는 접객실까지 흘러나오는 결의에 찬 그들의 말투도, 통일을 목전에 둔 듯한 흥분도 불편해했다.

오래전 부녀는 분단의 현실을 주제로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분단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세상이 됐는데, 젊은 세대가 민족의 통일을 지상 최대의 과제라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그녀의 아버지는 분개했다. 그녀는 “아버지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게 현실인 걸 어쩌겠어요? 있는 현실을 아니라고 우길 셈이신가? 사회주의자께서?”라며 주로 비아냥거렸고, 그녀의 아버지는 분노에 찬 시선으로 그녀를 노려봤지만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자신들의 투쟁이 무의미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아버지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생각했지만 묻지 않았다. 아버지가 옳았든 틀렸든 목숨을 걸고 무언가를 지키려 했지만 그녀는 불편한 모든 현실에서 물러나 노상 투덜댔다. 그녀는 아버지의 동지들을 보며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아버지는 1952년 위장 자수를 했다. 위장 자수이므로 당연히 최상급자인 전남도당 김선우 위원장만 그 사실을 알았다. 이대로 가면 빨치산은 전멸한다는 게, 그러기 전에 어떻게든 세상으로 내려가 조직을 재건해야 한다는 게 아버지의 정세 판단이었다. 아버지는 조직 재건을 하다 걸려 무기형을 선고받았을 때도 같은 판단으로 어떻게든 세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전향을 했다. 아리는 아버지가 위장 자수했다는 사실을 아버지로부터 직접 들어서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비전향 장기수였던 아버지의 동지가 북으로 가기 전 그녀에게 아버지가 위장 자수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그는 그녀에게 아버지를 의심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사실 그녀에게 아버지의 위장 자수든 전향이든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것으로 아버지를 비난할 생각이 없다. 하지만 북으로 간 아버지의 동지와 장례식에 참석한 아버지의 동지들에게 위장 자수이냐 아니면 전향이냐는 중요한 문제였다. 한 사람의 생 전체를 판단한 좌표 같은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장례식에 온 동지들에게 아버지는 ‘통일애국동지’가 아니라 ‘통일애국인사’다. 즉 아버지는 함께 통일애국운동을 하기는 했던 어떤 사람에 불과했다.

아버지는 언제나 새벽 네 시가 되기도 전에 잠에서 깼다. 새벽이 되기 직전, 어둠이 가장 깊은 시각, 아버지는 늘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웠다. 환한 낮이라면 지리산 능선과 노고단이 한눈에 바라보일 테지만 아버지 눈 앞에 펼쳐진 것은 깊은 어둠뿐이었다. 아리는 불도 켜지 않은 베란다에서 하얀 담배 연기를 어둠 속으로 피워 올리던 아버지의 여윈 등을 불쑥 떠올렸다. 아리는 아버지가 자신에게는 ‘빨치산 혁명 전사’라는 삶처럼 비장한 풍경으로 각인되었지만, 사실은 언제나 ‘덤덤’한 표정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언제나 모든 일에 덤덤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할머니가 세상을 떠날 때도, 빨치산 시절 보급 투쟁을 마치고 아지트로 돌아와 나뒹구는 동지들의 시신을 발견했을 때도 덤덤했다. 아버지에게는 소멸을 담담하게 긍정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었고, 개인의 불멸이 아닌 역사의 진보가 소멸에 맞설 수 있는 인간의 유일한 무기였다.

아리는 고3 여름방학 때 연좌제라는 것을 알고 공부를 작파했다. 당연히 성적은 바닥을 치는 중이었고, 대학에 갈 계획도 없었다. 담임은 그녀를 생각해 공부 잘하는 학생들로 스터디그룹을 만들어 그녀의 집으로 보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끔찍하게 아낀 담임의 호의를 의심했다. 왜냐하면 ‘빨갱이의 딸’인 그녀에게 타인의 호의는 악의보다 더 비참하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공부는 뒷전이고 ‘팔자 늘어진’ 채 소설만 읽었다. 노기에 찬 아버지가 호되게 꾸짖었지만 그녀는 반성은커녕 가출을 감행한다. 작은아버지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왔지만 아버지에게 원하는 것은 여전히 ‘빨치산의 딸로 살게 해서 미안하다는 진정한 사과’였다. 하지만 그녀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온 사람들로부터 아버지에 대해 그때까지 몰랐던 사실을 전해 듣는다.

나이가 들면서 사람의 마음속에는 어렸을 때의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은 점점 사라진다. 대신 타인에 대한 의심, 시기, 질투, 분노 등과 같은 때 묻은 감정이 그 자리를 채운다. 그 때문에 개인은 점점 불행해지고 세상은 팍팍해진다. “사램이 오죽하면 글겄냐”는 소설 속 아버지의 십팔 번이었다. 아리는 아버지의 그 말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을 뒤늦게 후회한다. 그리고 그의 오만, 무례, 어리석음을 너그러이 용서해 달라고 청한다. 그리고 고마움을 전한다.

작가가 그랬던 것처럼 필자 또한 지금까지의 삶을 ‘비극’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그 비극의 출발이자 원인은 아버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 ‘나의 비극은 (…) 더 멀리 더 높이 나가고 싶다는 욕망’에서 비롯됐다. 성장하고자 하는 욕망이 성장을 막았다. 더이상 성장하지 못하자 더 멀리 더 높이 나가지 않겠다고 위악을 부리기도 했다. 아버지 때문에 성장하지 못한 게 아니었음에도 말이다. 철이 없었을 때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호기를 부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버지만큼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 것 같다. 더 잘 살 수 있을 자신은 없다. 하지만 이제 더 잘 못 살지 않겠다는 다짐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작가는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나 잘났다고 뻗대며 살아온 지난 세월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라고 규정한다. ‘작가의 말’에서 ‘오만했던 청춘의 부끄러움을 감당한 자신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데 필자 또한 마찬가지다. 만일 필자가 소설 속 아리처럼 새벽 네 시에 아버지 곁에 서게 된다면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그간의 오만, 무례, 어리석음을 너그러이 용서해 달라고 청하고 고마움을 전할 것 같다. 이렇게 말이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윤정용 <문학평론가·칼럼·독자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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