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말하는 사회, 분노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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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말하는 사회, 분노하는 사회
  • 김상구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12.11.16 18: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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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란 인간의 정서와 사고를 표현하는 도구여서 사람의 됨됨이도 이것을 통해 밖으로 드러난다. 말이 거칠면 그 사람의 내면세계도 그와 비슷하거니와 행동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종걸 민주통합당 최고위원은 어느 대선 후보에게 "그년"이라고 언급했다가 슬그머니 "그녀"의 오타였다고 궁색한 변명을 했고, 민주통합당 김광진 의원이 자신의 트위터에 "명박급사(急死)"라는 내용의 글을 리트읫 하여 그의 품성에 의문을 품게 했다.

또한 연세대 황상민 교수의 "생식기"발언과 김성주 새누리당 공동선대위원장의 "영계"발언은 발설자의 설익은 정서를 그대로 노출한 것이어서 많은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서울 동부지방법원의 어느 부장판사도 피의자에게 "늙으면 죽어야 해요"라는 막말을 하여 사회적 물의를 빚었다. 이러한 막말 퍼레이드가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횡행하고 있음은 우리 언어생활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다.

막말에 버금가는 천박한 표현들이 대중문화에도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대중문화에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서가 스며들어 있다고 할 때, 싸이의 "강남스타일"의 가사가 전 세계의 인기를 누리는 것만큼, 우리의 대중문화가 건강한 것인지 되돌아보게 한다.

이 노래의 가사는 "밤이 오면 심장이 뜨거워지는 여자//커피 식기도 전에 원샷 때리는 사나이//지금부터 갈 데까지 가볼까//정숙해 보이지만 놀 땐 노는 여자//때가 되면 완전 미쳐버리는 사나이/근육보다 사상이 울퉁불퉁한 사나이"로, 6억 명 이상이 조회한 노래치고 듣기에 편하지 않다. 이 노래의 뜻을 알고 춤을 추며 따라 부르는 이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예전에 우리가 아름다운 팝송의 가사를 따라 부르며 이것을 통해 영어를 배우던 시절을 생각할 때, 대중문화에도 품격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외국인들이 이 노랫말을 따라 한국어를 배운다면 아름다운 가사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정치권을 비롯한 대중문화에서 막말이나 욕설을 사용하면 우리 사회의 정신문화도 이를 알게 모르게 닮아간다. 일상에서 청소년들의 대화에 욕설이 후렴구처럼 사용되는 경우를 종종 들을 수 있다. 댓글도 욕설을 퍼붓는 예가 허다하여, 일부 연예인들은 우울증으로 시달리다 자살에 이르기도 한다. 얼마 전 어느 학생은 뚱뗑이라는, 집단 언어폭력을 당하여 자살하고 말았다. 독설이 칼보다 날카로워 우리의 마음속에 커다란 상처를 입힐 수 있다는, 설망어검(舌芒於劍)이라는 경구를 교훈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예다.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조악한 언어들이 SNS를 통하여 전달된다면, 이것은 문명의 이기가 아니라 흉기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예부터 좋은 말과 글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말과 글은 사물의 본질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의사소통수단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과도한 수사(修辭)는 사물의 본질을 흐리는 언어의 치장술 정도로 여겨졌다.

공자는 "교언영색 선의인(巧言令色 鮮矣仁)"이라 하여 잘 꾸민 말(교언) 보다는 차라리 진실된 어눌한 말(눌변)이 낫다고 강조했고, 주희(朱熹)도 "문(文)이 도(道)를 싣는 것은 수레가 물건을 싣는 것과 같다"고 하여 말이나 글을 도를 싣는 수레에 비견하고 있다. 말이나 글의 중요성이 강조는 되고 있지만, 어떻게 말과 글을 사용하는 것이 효과적인 지는 다루지 않았다. 구체적 언어사용을 가르치기보다는 과묵함을 타인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다.

희랍의 이상주의자였던 플라톤도 동양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 시대의 소피스트들은 어떻게 말하는 것을 가르칠 것인가에 관심을 가졌다. 이들은 말하는 방법에 관심을 가졌고, 이들의 전통은 로마시대의 위대한 수사학자, 교육자였던 퀸틸리언(Fabius Quintilianus, A.D 35-A.D100)에게 이어져 『웅변가 교육』이라는 12권의 훌륭한 수사학 교과서를 남겨놓게 했다.

이 책은 단지 훌륭한 달변가를 길러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언어를 통하여 훌륭한 로마시민을 길러내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다. 퀸틸리언의 생각은 "사람이 사는 방식대로, 그렇게 말을 한다"로 요약된다. 그래서, 그는 언제부터 어떻게 말을 배우게 하고 글을 가르칠 것인가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고, 그 전통은 지금도 서구의 대학에서 교양과목으로 면면히 내려오고 있다. 국내 대학에서는 이제서야 말하기와 글쓰기 교육 강좌들이 생겨나고 있는 형편이다.

타인을 배려하는 말하기와 글쓰기가 성숙되지 않은 사회에서는 분노가 분출된다. 대화가 단절될 때 나타나는 분노는 폭력으로 이어지며, 폭력을 통한 분노의 해소는 문명화된 사회에서 정당화되기 어렵다. 이미 로마시대의 시인 호라티우스(Quintus Horatius Flaccus)가 "분노는 잠깐 동안 미치는 짓이다"라고 읊고 있듯이, 분노를 일으키는 막말과 욕설을 하는 행위는 "미친 짓"과 다를 바 없다. 가정과 학교, 사회의 꾸준한 노력과 교육만이 "미친 짓"을 일부라도 방지할 수 있다. 말과 글은 그 사람을 비추어주는 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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