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의병기념관, 충남의병의 정체성·지속가능성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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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의병기념관, 충남의병의 정체성·지속가능성 과제
  • 취재·사진=한관우·김경미 기자
  • 승인 2023.11.18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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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의병기념관, 충남의 항일·의병정신 어떻게 담을까 〈15〉
충청의병으로 상징되는 홍주의병은 홍주성을 거점으로 봉기했다. 홍주성은 홍주의병 항쟁의 상징적 존재이자 정체성의 핵심이다.
충청의병으로 상징되는 홍주의병은 홍주성을 거점으로 봉기했다. 홍주성은 홍주의병 항쟁의 상징적 존재이자 정체성의 핵심이다.

충남의 의병 독립유공자 161명, 전국의 2099명 대비 7.67%에 달해
홍주성 의병전투, 충청의병의 본류이자 총체적·상징적 구심체로 역할
홍주의병 전투, 봉기와 최후의 목적은 바로 ‘홍주성’ 점령 통한 항전
홍주(洪州), 충청의병·홍주의병 항쟁의 상징적 존재이자 정체성 핵심


충남지역에서 의병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다고 하지만 독립항쟁 등 의병 활동사를 연구하고 기억하는 데는 소홀했던 측면이 다분하다. 전국 70여 개 기념관 중 의병운동과 이와 관련한 기념관은 8개소 정도에 불과하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이마저 개인 추모 기능이 강화된 사우에 부설된 소규모 기념관이 대부분이라는 지적이 그것이다. 의병은 외적에 맞서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비정규군을 말한다. 

충남의 경우 의병 독립유공자가 161명으로 전국 2099명 대비 7.67%에 달한다. 그러나 의병기념관은 없는 실정이다. 충남지역의 경우 옛 홍주목으로 대표되는 홍성과 예산을 비롯해 충남 서부지역에서 치열한 독립항쟁과 의병 전쟁이 전개됐음에도 의병의 역사를 지역공동체 구성원들과 공유할 수 있는 의병기념관은 없다. 따라서 지역의 항일 독립 항쟁사와 의병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지역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지역의 항일운동과 관련한 기억을 발굴, 수집, 연구하고, 시민사회와 공유하는 공간은 필수적으로 필요하다. 지역의 역사적 사건에 대해 기억을 되살려줘야 할 책무가 후손들을 위해 필요하기 때문이다. 충남지역에서 일어난 의병항쟁의 눈부신 활약과 ‘충남의병기념관’을 설립했을 때, 운영 방향, 충청 의병항쟁의 중요성, 전개 과정과 특징 등 충남 항일정신의 뿌리인 항일의병 전쟁은 의병으로 시작해 독립운동으로 나아간 항일정신의 뿌리이다. 이는 곧 충청 정신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충남의병기념관’의 건립보다 중요한 것은 지속적인 운영을 위한 체계적이고 전략적인 계획 마련이 우선적이라는 지적에 주목할 일이다.
 

■ 홍주성 전투, 전국 의병항쟁 폭발 도화선
충남의병기념관 건립을 놓고 홍성군과 예산군의 유치전이 치열한 가운데 충남도가 지난달 17일 의병기념관 건립과 관련한 연구용역 중간 보고회를 개최했다. 이번 보고회는 의병기념관의 입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자리였지만 비공개로 진행됐는데, 두 지자체 모두 양보할 수 없는 예민한 사안이어서 비공개로 진행됐다는 분석이다.

충남의병기념관 건립은 김태흠 지사의 선거 공약으로 충청남도의 항일 유적을 한곳에 모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충남의 의병 정신을 널리 알리겠다는 취지로 공약한 사업이다. 도정인수위가 지난해 6월 의병기념관 위치로 예산을 지목했지만, 이웃인 홍성군이 ‘홍주의병도시’를 내세우며 반발, 유치전이 벌어졌다. 홍성군은 홍주의병 전투가 있었던 역사적 장소인 홍주성에 건립을 주장하고 있고, 예산군은 윤봉길 의사의 생가가 있는 충의사를 후보지로 내세우고 있다.

충남도는 홍성과 예산의 입장을 고려 제3의 대안으로 ‘충남도청내포신도시 홍예공원’를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충남도청내포신도시’는 행정구역상 홍성군과 예산군에 걸쳐 있고, 충남도청과 충남교육청 등 충남의 주요 공공기관들이 입주해 있는 점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공교롭게도 ‘충남도청내포신도시 홍예공원’은 홍성의 홍주성과 예산의 충의사를 잇는 중간 지점이며, 홍성군과 예산군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홍성군과 예산군의 갈등을 조정할 수 있다는 점은 장점으로 꼽힐 수 있을지 모른다. 다만, 충남의병기념관의 건립 취지에 맞는 위치와 장소인지, 충남의병기념관을 건립하기에 적절한 부지와 지형을 갖추고 있는지 등은 의문점으로 제기되고 있다.

충남의 의병항쟁은 홍성과 예산뿐 아니라 아산, 부여, 청양, 보령, 서천 등 충남 서북부의 전 지역에서도 활발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당시는 충남 서북부의 대부분 지역이 ‘홍주목’의 해당 고을이었기 때문에 ‘홍주성’ 탈환을 위해 홍주를 중심지로 대부분 지역(내포지역)에서 ‘홍주의병 항쟁’이 활발했기 때문이다. 의병은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는 1894년 청일전쟁을 계기로 처음으로 봉기했다. 

1895년에는 명성황후 민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과 단발령 등이 연이어 발생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반일 감정은 극도에 이르렀고, 이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의병항쟁이 일어났다. 1895~96년에 일어난 을미의병은 재야 유생을 주축으로 하고 일반 평민층이 여기에 가담해 봉기했다. 충청도 홍주의병(洪州義兵) 역시 유생이었던 김복한·이설·안병찬 등이 중심이 된 충청의병(홍주의병)은 을미의병의 상징이며, 그 중심에는 충북의 제천의병 항쟁과 충남 홍주(洪州; 홍성)의 ‘홍주의병(洪州義兵)’ 항쟁이 있었다.

홍주의병은 을사늑약에 항거해 1906년 다시 의병을 봉기했으며, 일본 정규군과의 치열한 홍주성 전투를 치렀다. 홍주성 전투는 전국적으로 의병항쟁을 폭발시킨 도화선이 됐으며, 충청의병의 본류이기도 했다. 결국 충청의병의 총체적·상징적 구심체로 역할을 했으며, 그 중심에는 충청도 4목이었던 홍주성이 있었다. 충청도에서 공주도 아니고 청주나 충주도 아닌 제천과 홍주가 그 중심에 있었던 것은 투쟁의 저변에 깔린 의병의식과 정치사회적, 사상적 기반의 정체성이 끈질긴 항일투쟁의 전개 배경으로 주목되는 점이다. 
 

■ 충청(홍주)의병 최후의 목적 ‘홍주성’ 점령
홍주의병은 관찰사 이승우의 배신으로 인해 불발로 끝난 의병으로 알려져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홍주의병의 전 단계라 할 수 있는 ‘모병운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896년 홍주의병이 본격화되기 이전인 1895년 4월부터 홍주의 ‘광천’을 중심지역으로 한 안창식 등의 모병운동은 제1차 홍주의병의 시작이었다. 이는 1896년 홍주의병의 본격화 이전에 이미 의병봉기를 위한 준비가 민간에 의해 진행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이미 청양의 정산전투와 남포전투와 같은 재기의 사실에서 확인되고 있다. 

홍주의병의 합천전투(지금의 청양군 화성면 합천)와 지치(支峙, 현재의 부여군 내산면 지티리)에서의 재기를 통해 홍주성 전투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이후 홍주의병은 광천을 거쳐 결성으로 진군, 하루를 지낸 뒤 5월 19일(음력, 4월 26일)에 홍주로 들어왔다. 홍주의 삼신당리에서 일본군과 싸워 이긴 의병부대는 구식 화포 2문을 선두에 내세워 홍주성을 포위 공격했다. 의병은 홍주성 남문에서 일본 헌병과 총격전을 벌였으며, 오후에는 홍주성 서문으로 부대를 진격시키자 일본 헌병들이 홍주성 동문을 통해 덕산 방면으로 도주했다. 드디어 의병들은 5월 20일 아침에 마침내 ‘홍주성(洪州城)’을 점령했다. 

당시 충청의병으로 상징되는 홍주의병은 홍주성을 거점으로 해 1895년의 행정구역을 중심으로 활동했음이 확인되고 있다. 1896년 1월에 봉기한 홍주의병은 1895년의 홍주부 행정구역 범위의 인물들이 참여했으며, 활동 또한 홍주부 지역에서 이뤄진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1906년 홍주의병은 예산 광시에서 봉기했다가 청양 합천전투에서 패했다. 다시 의병을 일으킨 곳은 홍산의 지치로 서천, 남포, 결성을 지나 홍주성을 점령하고 항전했다. 홍주의병 전투의 봉기와 최후의 목적은 바로 ‘홍주성(洪州城)’ 점령을 통한 항전이었다는 점이 확인된다. 

홍주는 지역의 공동생활권이며, 방위권과 경제권, 문화권도 동일한 특성이 있는 곳이다. 충남 공주나 대전 등 동부권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따라서 홍주(洪州), 지금의 홍성을 중심으로 한 충청남도 서북부지역을 ‘홍주문화권’으로 보고 있으며, 충청남도의 행정수도 또한 충청남도청을 비롯한 행정기관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이 홍주의병으로 대표되는 충청의병의 정체성과 상징성, 그 정신이 서린 곳이다. 이곳이 바로 ‘홍주성’이며, 홍주의병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 ‘홍성900의총(洪城九百義塚)’으로 불렸던 바로 지금의 ‘홍주의사총(洪州義士冢)’이다. 따라서 충청남도의 ‘충남의병기념관’의 건립 장소로는 홍성과 예산의 유치전을 떠나서, 용역을 포함한 제3의 대안 등 선택적 사항을 차치하고 마땅히 ‘홍주(홍성)’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이유다.

홍주(洪州)는 충청의병, 홍주의병 항쟁의 상징적 존재이자 정체성의 핵심이다. 이곳에 충청의병, 홍주의병의 정체성이자 상징성, 충남정신을 상징적으로 간직한 ‘충남의병기념관’이 마땅히 건립돼야 한다는 당위성이다. ‘충남의병기념관’의 건립장소를 둘러싼 갈등과 대립, 변칙과 편법은 의병 정신의 본질이 아니며, ‘홍주의병(洪州義兵)’의 정신이나 충남의 정신이 아니기 때문이다.<끝>
 

홍주의병 기념탑 준공비에 있는 홍주의병상.
홍주의사총 홍주의병기념탑의 홍주의병 부조상 조형물.

<이 기사는 충청남도 지역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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