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을 통과한 노동 시로 노동의 참된 가치와 얼의 새로운 길을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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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을 통과한 노동 시로 노동의 참된 가치와 얼의 새로운 길을 만들다
  • 정세훈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4.01.18 08: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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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 시인의 첫 시집

“내가 너에게 편지 부치러 갈 때/한가한 우체국 입구에 나와/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인사하던 우체국장 아저씨/꼭 나의 비밀을 아는 것 같았다/그럴 때면 나는 뚱뚱한 우체국 아가씨가 볼까봐/얼른 편지를 부치고,/그리고 얼마나 후회했던가/내 뜨거운 편지가/지구를 삼천댓 바퀴 돌다 도착했으면 싶었다/사랑한다는 귀절에 세월의 곰팡이가 슨 채/이쁘게 늙은 너의 손주 손에 배달되어/노인대학 야유회 간 너를 기다리든지, 아니면/먼지가 더께로 낀 너의 창문을 기웃거리다/수취인 불명이 찍혀/바람이 내 무덤 앞 넓적바위에/일몰 직전 햇살처럼 쓸쓸히 반송해주길/나는 정말 얼마나 꿈꾸었던가/셔터가 내려진 철산동 우체국/어둠 속에서 넋없이 바라보다 돌아선 날/내 방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오십억 광년쯤 떨어진 별을 들렀다 갈/편지를, 너에게 쓰기로 했다”

위 시는 고뇌에 찬 성찰의 노동 시 작업을 통해 끊임없이 노동의 참된 가치와 얼의 새로운 길을 만들어 제시해 가는 황규관 시인이 1998년 출판사 ‘내일을 여는 책’에서 펴낸 첫 시집 <철산동 우체국>의 표제 시 전문이다. 통상적인 부 배치 없이 표제시를 비롯해 ‘한강’ ‘김氏’ ‘病’ ‘푸른 작업복을 입으며’ ‘섬’ 등 노동의 성찰을 통과한 63편의 시들이 수록된 시집은 읽는 이를 한없이 숙연하게 한다.   

문종필 평론가는 시인에 대해, 2020년 웹진 ‘문화 다’에 게재한 ‘때로는 아픈 게 큰 싸움이 된다’라는 제목의 시인과의 인터뷰 글에서 “황규관 시인을 만나기 위해 그가 출간한 여섯 권의 시집을 읽는다. 이 시집들을 읽으면서 시인에게 가장 먼저 묻고 싶었던 것은 그가 걸어가고자 하는 길이다. 

1998년 4월 30일에 발행된 첫 번째 시집 ‘철산동 우체국’ 에서부터 2019년 10월 1일에 출간된 ‘이번 차는 그냥 보내자’ 까지 그는 20년 동안 단 한 번도 바람의 길을 의심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묻고 질문하며 산들거리는 바람에 희망을 걸었다.”면서, “없던 길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반복의 반복을 거듭하다 보면 실제로 새로운 길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황규관 시인은 이러한 신념을 밀고 나가는 데 심지가 곧은 사람이다.”라고 기술했다.

이에 화답하듯, 시인은 현재 시 작업에서 뿐만이 아나라 자신이 운영하는 출판사 ‘삶창’에서 ‘삶창시선’ 시집을 꾸준히 발간, 노동의 참된 가치와 얼의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가고 있다. 이러한 독특한 시 작업 활동이 시단으로부터 높이 평가받아 2020년 시집 ‘이번 차는 그냥 보내자’로 백석문학상을 수상했다. 

당시 상을 주관한 도서출판 창비는 “노동 경험의 ‘핍진성(진리에 가깝거나 흡사한 정도)’을 존재론적 기원의 한 축에 두고, 다른 한 축에 분명하고 서늘한 자연 사물의 운행 원리를 배치해가는 시인 황규관의 서정성이 보물처럼 빛나는 결실”이라며 선정 이유를 밝혔다. 이어 “이 시집은 한국 리얼리즘 시의 한 수준을 보여주면서도 우리 시가 발 딛고 있어야 할 현실과 그 광활한 지평선을 활짝 열어줬다”고 평가했다.


포항제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제철소 노동자로 일하며 시 작업을 시작한 시인은 1993년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등단했다. 시집 ‘철산동 우체국’, ‘물은 제 길을 간다’, ‘패배는 나의 힘’, ‘태풍을 기다리는 시간’, ‘삼례 배차장’, ‘정오가 온다’, ‘이번 차는 그냥 보내자’, ‘호랑나비’, 등과, 산문집 ‘강을 버린 세계에서 살아가기’, ‘리얼리스트 김수영’, ‘문학이 필요한 시절’,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등이 있다.


정세훈 <시인, 노동문학관장, 칼럼·독자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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