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대졸 학력 무시하고 공장노동자가 되어 ‘노동자 시의 대모’ 역할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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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대졸 학력 무시하고 공장노동자가 되어 ‘노동자 시의 대모’ 역할을 하다
  • 정세훈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4.04.18 08: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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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 시인의 첫 시집 <無花果는 없다>

1980년대 초, 23살에 고려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한 후 스스로 학력을 무시하고 공장에 들어가 조립공, 시다, 미싱사, 학습지 배달 등의 가장 서민적 노동을 한 김해자 시인이 2001년 7월 출판사 실천문학사에서 첫 시집 <무화과(無花果)는 없다>를 ‘실천문학의 시집’ 135번째로 출간했다. 

공장노동자가 된 후 인천지역 여성노동자운동권의 대모 역할을 했으며, 1998년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후에는 ‘노동자 시의 대모’ 역할을 한 시인의 이 첫 시집에 대해 시인 황지우는 뒤표지 글에서 “그의 시는, 드러내면 양심이 되었을 상처도, 드러내면 ‘끗발’이 되었을 경력도, 드러내면 ‘지나간 구호’가 될 이념도 다 회피하고 다만 ‘지나갔으나 지나가지 못한 삶’을 잔잔하게 응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응시는 결코 모럴리스트의 긴장된 눈초리가 아니다”라며 “그의 시 도처에는 부대끼는 삶에서 뻗어 나오는 어떤 선한 의지가 느껴진다. 나는 그의 시에 맑게 고여 있는 이런 순도 높은 덕성이 맘에 든다”고 호평했다.

故 박영근 시인도 같은 글에서 “김해자의 시가 드러내는 세계는 ‘터널 속’과 같은 어둡고 고통스러운 현실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그리운 눈빛’을 만나겠다는 것이다. 즉 현실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오래 기다려온 밝은 눈빛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라며 “고통을 수락한다는 것은 자신이 가치 있다고 믿는 것들의 의미를 지키고 내면화하려는 태도이다. 그리고 언어와 싸운다는 것은 근본의 자리를 찾아 나서려는 고통의 내면화 과정을 ‘시’라는 몸으로써 수행하겠다는 태도이다. 김해자의 시에서 우리가 진정성을 보는 연유가 거기에 있다”고 호평했다.

김정환 시인은 ‘노동자와 시인, 그리고 김해자’라는 제목의 시집 해설에서 “김해자의 첫 시집을 읽으면 우리는 ‘노동자시’ 혹은 ‘노동시’라고 이름 붙혀졌던 맥락의 장점과 한계를 조감도로 동시에, 중첩적으로 조명하다가 다시 ‘한밤중’으로 돌아오게 된다”면서 “그녀가 한밤중 자체를 시-미학의 뼈대로 삼아, 노동자시는 최고의 시를 뜻하며, 최고의 시는 노동자시라는 명제를 완성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 그래서 더욱 간절하다”고 논했다.

“장대비 속 후줄근한 시위는 끝나고/누군가는 돌아오지 않고 피어나지 못한 채/시들어가는 부용산, 노래 같은 떨거지끼리/미라가 되어버린 생강이며 무화과/안주 삼아 술을 마시다 문득/떠오른 남녘 땅 무화과 수//어릴 적 마당가 돌담에 단단히 서 있었지/크낙한 잎을 따면 하얀 수액 방울방울 흐르고/퍼렇다 못해 어두운 그늘 깊던,/산수유며 해당화 다 피고 지도록/벌 나비도 찾지 않아 늘 외로워 보이던,//꽃 없는 과실이 어디 있으리/조금 늦게 피는지 몰라 수술 그득 채우느라/꽃잎이며 꽃받침 밀어 올릴 틈이 없는지/조금 더 기다려야 하는지도 몰라/꽉 찬 살이 터지며 꽃잎을 터트릴 때까지//과육의 껍질이 꽃을 숨기고 있었던 거라구/보아, 십자로 벌어진 과육이 터트린 네 잎의 꽃을/열린 꽃잎 사이로 반짝이는 수백의 꽃술을/그러니까 기다림이 꽃잎을 틔우는 거야/천천히 보아, 진한 자홍색의 향기를/裸花果의 속살을”(표제 시 ‘無花果는 없다’ 전문)

시인은 1961년 전남 신안군에서 출생했으며 시집 <無花果는 없다>, <집에 가자>, <축제>, <해자네 점집>, <해피랜드>, <니들의 시간> 등이 있다. 전태일문학상, 백석문학상, 이육사 시문학상, 만해문학상, 구상문학상을 수상했다.
 

정세훈 <시인, 노동문학관장, 칼럼·독자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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