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결혼이주여성과 함께한 아름다운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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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결혼이주여성과 함께한 아름다운 여행
  • 류정원(홍성이주민센터 한국어학당 교사)
  • 승인 2013.04.05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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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이주민센터 한국어학당 교사 캄보디아 연수기②

홍성이주민센터-이주여성한국어학당의 한국어교사들은, 지난 2월24일부터 3월6일까지 캄보디아 연수를 다녀왔다. 캄보디아에서 홍성으로 시집온 소페아와 동행하여 캄보디아 문화유적 탐방과 소페아, 모태이, 찬사룬의 친정집을 방문하는 일정으로 진행된 이번 연수를 통해, 참가자 모두 홍성과 캄보디아가 가까운 이웃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가르치는 대상이 친구로 변하는 이 특별한 경험을 통해 홍성지역사회가 아름다운 다문화공동체가 되는 계기가 되길 소망하며 3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주> 



이번에 방문할 이주여성들의 친정은 프놈펜에서 가까운 '깜뽕 짬'이라는 곳이다. 다행스럽게도 방문할 세 곳이 각기 다른 곳에 있지 않고 같은 지방에 있어서 많이 돌아다니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 더위에 무척 약해서 35, 36도를 웃도는 날씨는 나에게는 쥐약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나은 것은 건기이기 때문에 습도가 낮다는 것이다.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으니 포장이 되지 않은 길은 먼지가 풀풀 날린다. 앞도 잘 안 보인다.

 

 

 

 

▲ 오른쪽에 보이는 기둥은 마을마다 있는 절의 입구. 보통 절에는 학교가 같이 있다. 학교에 절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학교가 절 안에 있다. 캄보디아는 95%가 소승불교를 믿는다. 아주 소수의 이슬람이 있는데 우리가 가는 길에 이슬람 마을이 있었다.


먼저 찬사룬 씨 집에 갔다. 같이 가는 소페아 씨도 처음 가는 길이라 전화로 어머니가 집 앞에 나와 기다리셨다. 타고 간 차가 햇볕에 뜨거워질세라 그늘에 차를 대라고 하셨다. 집으로 가니 울타리가 있는 것 마냥 옆집에 둘러 싸여 안온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온다고 망고며 귤, 사과, 수박을 내놓으신다. 사과나 귤은 캄보디아에서 나지 않고 수입한 거라 돈 주고 일부러 산 것이다. 망고는 마당에 망고나무가 있어서 직접 따놓은 것을 주신 것이다. 덜 익은 것은 약간 신맛이 강한데, 소금을 찍어 먹는다. 필리핀에서 먹었던 그린망고보다 훨씬 달고, 여기 소금은 아지노모토라는 일본 조미료를 섞기 때문에 망고만 먹었다. 너무 먹을 것을 많이 내 주셔서 오히려 미안했다. 딸 찬사룬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면 동영상으로 찍어 한국에 돌아가 보여주겠다고 하여 어머니와 동생의 동영상을 찍었다. 가족들을 보니 서로 아주 많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이 느껴져 마음이 짠했다. 그런데, 5월 정도에 찬사룬 씨 어머니가 한국 방문을 하신다니 다행이다 싶었다. 방에 올라가 보니 사진이 걸려 있는데, 찬사룬 씨가 동생하고 찍은 사진이 있었다. 드레스를 입고 있어서 꼭 미인대회에 나가서 찍은 사진처럼 예쁘다. 우리하고 다른 것을 여기서 느꼈다. 우리는 정장 드레스나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는데, 여기는 야회복 같은 드레스를 입는다. 이것이 서양의 지배를 받은 영향이 아닌가 싶었다.

여기 집들은 더워서도 그렇지만, 우기에 물이 많이 불어나기 때문에 높이 집을 짓는다. 그래서 집 아래는 여러 용도로 쓰인다. 창고로도 쓰이고 목욕시설이나 주방이 들어서기도 한다. 보통은 이층에 주방이 있는데, 건기에는 아래층에서 밥을 한다. 집 옆에는 물을 받아쓰는 물 항아리가 놓여 있다. 처음에 보았을 때에는 오지항아리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시멘트 항아리였다. 더 머물다 가라는 말씀을 뒤로 하고 섭섭하고 아쉬운 마음을 접고 다음 방문지를 향해 길을 나섰다.

 

 

 

 

 

 

▲ 캄보디아 학교의 교실 풍경


■ 사랑스런 딸 결혼이주여성 
다음은 모태이 씨 집이다. 모태이 씨는 아이가 둘이다. 모태이 씨는 동생이 많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이 셋인가 넷이나 되었다. 끝에서 둘째 동생은 어려서 눈을 다쳐서 아직도 한쪽 눈이 퉁퉁 부어 보이는데, 여러 차례 수술을 했는데도 고치지 못했다고 한다. 어떻게 해서라도 낫게 해 주고 싶지만, 만약에 어떻게 해볼 수 없다고 하면 더 큰 실망이 될 것 같아서 망설여진다. 만약에 한국인 의사가 가서 보고 나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면 그때 방도를 찾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내리고 돌아왔다. 모태이 씨 집에 가 보고 한국에서의 모태이 씨를 생각해 보니 참 달라 보인다. 약간 이상한 행동을 한다고 편견을 갖고 있었는데, 한 가족의 사랑스런 딸이고 든든한 언니이고 참 용감한 여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 찍은 동영상을 보여 주니 가족들이 모두 눈물을 흘린다. 여기서도 먹을 것을 많이 마련해 놓고 대접해 주셨다. 생각보다 너무 환대를 받아서 괜히 방문해서 폐를 끼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도 딸이 그리워서 얼굴도 모르는 생판 남인 한국 사람들을 이리도 귀한 손님 대접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잘 왔다고 위안해 보았다.

모태이 씨 집 앞으로는 메콩 강이 흐르는데, 바로 앞에 배가 매어져 있다. 아마 고기도 잡는 것 같다. 시간이 더 있으면 배도 한 번 태워달라고 해보련만, 갈 길이 바빠서 그냥 나왔다. 마지막으로 소페아 씨 집으로 갔다. 저녁을 먹고 씻으라고 해서 내가 조카와 먼저 씻었다. 원래는 욕실이 없었는데, 지난번에 사위(소페아 씨 남편) 왔을 때 새로 지었다고 한다. 불도 안 들어와서 발전기를 돌려서 선풍기도 돌리고 TV도 본다. 머리를 감고 몸을 씻고 보니 물이 많이 줄었다. 씻을 사람이 아직 많은데, 물이 부족하겠다는 생각만 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니 아무 생각 없이 내가 너무 물을 많이 썼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이 건기라 물이 귀한데, 내가 통의 물을 거의 삼분의 일을 썼으니 다른 사람들은 아주 조금만 써야 했다. 물 한 바가지로 머리감고 몸까지 씻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여기서는 그렇게 물을 아껴야 한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소페아 씨 아버지는 학교 선생님이신데, 지금은 도서관장으로 계신다고 해서 학교 구경도 했다. 학교 앞에는 매점이 있는데, 마을사람들도 식사를 하는 곳이다. 여기도 소페아 씨 친척이 하는 가게다. 빵과 진한 커피로 아침을 먹고 학교에 들어갔다. 초중학교가 같이 있고, 여기도 절이 있다. 절 안에 학교가 있는데, 절은 아직 공사 중이다. 있던 절을 철거하고 새로 짓는 중인지 요사채(스님이 머무는 살림집)는 옛 방식 그대로 나무건물이었다. 학교를 나오는데, 스님이 영어로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젊은 스님인데 영어로 이야기를 걸어오는 걸 보니 캄보디아에 영어 바람이 분 것 같았다. 의외로 관광지에도 프놈펜에서도 영어로 대충 의사소통이 된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살기 위해 영어를 사용하는 것 같다. 생존영어……. 한국에서 이주여성들이 한국어를 배우는 것도 생존한국어겠지 싶다.

 

 

 

 

 

 

▲ 소페아 친정식구들과의 저녁식사


■ 동병상련 심정으로 문화 이해 
가정방문을 하고 느낀 것은 여기 사람들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그렇게 찢어지게 가난하고 먹고 살 수가 없어서 우리나라에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물질적으로야 지금 당장은 우리보다 가진 것이 많진 않지만, 극한의 가난 때문에 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참된 용기를 가지고 자기 삶과 운명을 스스로 헤쳐 나가는, 도전하는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리고 캄보디아라는 나라에 대해 전보다 조금 더 알게 됨으로써 사람 하나하나를 이해하고 존중하게 되었다. 피상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체험한 문화는 서로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이것은 서로를 존중하게 하는 바탕이 된다. 물질은 부족하나 우리가 경제발전을 이룩하면서 잃어버린 것을 되돌아보고 우리가 잃은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고마운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우리의 전철을 밟지 않고 인간의 고귀함과 소중한 것을 잃지 않으면서도 잘 살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빌어본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인다면 힘을 키워서 자기 것을 지켰으면 하는 것이다. 크메르 문명이 참으로 뛰어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힘이 없으니 태국이나 베트남에게 빼앗겨서 어쩌면 역사가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태국 무예 '무에타이'가 참으로 캄보디아 것이라는 사실, 베트남의 쌀국수 원조가 캄보디아라는 사실, 앙코르 왓을 태국이 자기네 것이라고 억지를 부린다는 사실들이 내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 동병상련이랄까? 경제력이 문화의 척도는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깨달은 기회였다. 더욱 열심히 한국어를 가르쳐서 한국사회에서 당당하게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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