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恨)의 인장(印章)으로서 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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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恨)의 인장(印章)으로서 족보
  • 윤정용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5.02.0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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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용문학평론가칼럼·독자위원
윤정용
문학평론가
칼럼·독자위원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책 《한국 나쁜영화 100년》(2021)에서 1970년대 말 1980년대 초 ‘영화를 꽤 알고 본다는 자부하는 사람들’, 소위 ‘시네필’은 한국 영화를 방화로 취급했고, 대신 프랑스문화원 독일문화원을 전전하면서 잘 알지도 못하는 유럽 영화에 자신들의 청춘을 바쳤다고 고백한다.

그에 따르면, 당시 시네필에게 한국 영화는 봐서도 안 되고, 설령 봤어도 봤다고 말해서도 안 되는 일종의 금기 사항이었다. 그런데 그는 한국 영화에 대한 그릇된 시각을 바꾼 영화가 바로 임권택 감독의 <족보>(1978)였다고 말한다. 서구 영화의 문법에 익숙한 그에게 당시 임권택 영화는 ‘난공불락의 수수께끼 같은 대상’이었다. 나중에 그는 영화작가연구 총서의 책임편집자로서 임권택과 장시간 인터뷰를 진행하며 임권택 영화, 더 나아가 한국 영화에 대한 기념비적인 평론서를 완성한다. 어쩌면 영화평론가로서 정성일의 출발점은 임권택 영화, 그중에서도 <족보>라고 할 수 있다.

<족보>는 임권택의 필모그래피에서 새로운 기점으로 언급된다. 영화평론가 박유희에 따르면 임권택 영화는 크게 두 시기로 나뉘는데, 흔히 ‘작가로서의 경향’이 드러나는 후기 영화의 흐름에서 <족보>는 <잡초>, <왕십리>와 함께 그 첫머리에 놓인다. 그녀는 “<족보>가 보여준 인물형은 한국영화사, 나아가 한국문화사에서 선구적 의미를 선취했다”고 상찬한다. 감독 자신도 이 영화에 이르러 비로소 시네마스코프의 화면을 감당할 수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족보>를 찍기 전까지는 닥치는 대로 감독을 했고, <족보> 촬영 때부터 심오한 인간성을 추구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게 됐다고 밝혔다.

영화 <족보>는 총독부로부터 창씨개명을 진행하라는 명령을 받은 경기도청 총력 1과에서 근무하던 일본 청년 다니(하명중)는 창씨개명을 설득하기 위해 설 씨 집성촌에 찾아가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다니는 설 씨 문중의 종손 설진영(주선태)을 만나 창씨개명을 설득하지만 설진영은 이를 거절한다. 다니는 한편으로는 설진영의 강직한 면모에 감명을 받고 다른 한편으로 설진영의 딸 옥순(한혜숙)에게도 끌린다. 그는 자신의 본분과 조선인들의 족보와 혈통에 대한 존중 사이에서 갈등한다.

하지만 다니의 갈등과는 무관하게 일제는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설진영을 압박한다. 딸 옥순의 약혼자를 헌병대에 끌고 가서 하지도 않은 독립운동 혐의를 뒤집어씌워 고문하고 지원병으로 입대해야만 풀어주겠다며 협박해 그를 실성하게 만들어 파혼에 이르게 하고, 설진영의 아들과 손자들까지 압박을 가한다. 결국 설진영은 면사무소로 가서 가족들의 이름을 모두 일본 이름으로 바꾼다. 창씨개명을 한 후 표정이 한층 밝아진 손자들의 재롱을 본 뒤 사랑방에 혼자 쓸쓸하게 남은 설진영은 족보의 마지막 장에 “자신의 무력함으로 인해 족보가 끊어져 설 씨의 역사가 끊어졌으니 그 역사를 따라갈란다”라는 내용의 유서를 적은 후 독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다니는 과장에게 설진영의 사망 소식을 전한다. 과장이 “그런 비국민(非国民)이 죽은 소식을 내가 들어야 하나”고 말하자 다니는 분노해 “술집에서 여자 엉덩이나 만지는 네 놈이 비국민이다!”라고 비난하며 옆에 있는 전화기로 머리를 내려친다. 과장은 머리가 피투성이가 된 채 옆으로 굴러 쓰러진다. 다니는 설진영의 장례식에 조문하고 언덕에서 옥순과 함께 운구 행렬을 바라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족보>에는 두 명의 주인공이 나온다. 일본인 다니 로쿠로와 설씨 가문의 종손 설진영이다. 다니는 조선총독부 경기도청 총력 제1과에 근무하는 일본인 공무원으로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창씨개명을 종용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업무는 일제 군국주의 치하에서 살아남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일 뿐이다. 그의 정체성의 핵심은 그가 미(美)를 알고 조선의 문화를 이해하는 화가라는 사실이다.

영화에서 한국의 전통 미술 및 공예품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야나기 무네요시의 책이 설진영의 목소리를 통해 영화에서 길게 인용되는데, 이는 영화의 의미 구조와 다니의 성격화에서 매우 중요하다. 다니는 한국 영화에서 드문 일본인 유형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한국영화사에서 일본인, 그중에서도 식민지 시기의 일본인은 대체로 악인 또는 가해자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다니가 한국의 전통문화를 찬미하는 것은 한국 대중의 잠재의식에 자리 잡은 과거사에 대한 보상 심리를 충족하는 것으로 민족주의의 발로로 볼 수도 있다.

전술했듯이 설진영은 창씨개명을 거부해 우물에 돌을 안고 빠져 자결한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하고 있다. 영화의 서두에서 권위적인 서술을 통해 식민지 시기 말기에 대한 설명이 이뤄지는 것은 이 영화 전체 서사에 강고한 전제로 작용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일견 설진영을 민족주의자로 판단하도록 이끈다. 하지만 정작 영화에 그려지는 설진영은 민족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가진 것을 지키려는 기득권층이자 그러기 위해 현실과 타협하는 순응주의자다. 그는 일본 군대에 헌금하고 공출에 협조한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친일파’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가 창씨개명만은 완강히 거부한다. 칠백 년 이상 내려온 족보의 전통을 자기 대에 와서 깨뜨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총독부의 온갖 협박과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버틴다. 심지어 사위가 고문을 받아 폐인이 되어도 꿈쩍하지 않는다. 그러던 그가 결국 창씨개명을 하지 않아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한다고 손자들이 하소연하자 창씨개명을 결정한다. 그리고 종손으로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설진영은 집안을 지키기 위해 친일을 서슴지 않았지만 집안의 성씨조차 지킬 수 없는 순간이 닥친다. 족보는 후세에는 의미 없을 수 있는 것이고 설진영 스스로 족보를 일본인에게 맡김으로써 그렇게 판단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는 종손으로서 족보를 지키지 못한 책임을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 책임을 지는 것은 ‘사람’으로서 얼굴을 들고 살 수 있게 하는 마지막 선이었다. 따라서 그의 선택은 ‘친일/반일’, ‘지조/변절’ 등의 관습적 이분법에 준거하여 해석될 수 없다. 지금까지도 이분법의 경계를 넘어서는 인물이 장르 영화의 유희성 속에서 운신의 폭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것을 상기하면 설진영의 결정은 의미심장하다.

영화 <족보>는 기자야마 도시유키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하고 있다. 그런데 영화보다도 한운사 극본으로 TV 드라마로 먼저 만들어졌다. 한운사는 자서전 《구름의 역사》(2006)에서 가지야마 도시유키와의 만남, TV 드라마 <족보>, 일제 강점기의 상황 등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1940년대 일본은 조선 사람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라고 했다. 동화작용을 노린 것이다. 조선 사람을 완전히 일본 사람으로 만들자는 속셈이었다. 동근동조라는 말을 그들은 했다. 대동아 공영권은 큰 간판이었다. 만약에 일본이 1945년에 패망하지 않고 10년이라도 더 끌어갔다면 이 정책이 어떤 결과를 낳았을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임권택 감독도 비슷한 맥락으로 말한다. 그가 <족보>에 끌린 이유로 자신이 국민학교 다닐 때 한국말을 썼다고 다른 반 담임 구니모도한테 맞았던 일을 든다. 일본 사람으로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창씨개명한 조선인이었다. 구니모도는 국본(國本)의 일본어 발음이고 이(李)의 창씨개명이다. 임권택은 이에 충격을 받았고 영화 <족보>에 쉽게 끌렸다고 밝혔다.

<족보>는 임권택의 작품 세계가 정립되기 시작하는 ‘걸작 영화’다. 임권택 감독 또한 스스로 “이 시절, 서양 영화, 특히 미국 영화의 아류에서 벗어나 한국적인 개성을 담아내려는 노력을 해왔는데, 이 노력이 드러나기 시작한 작품이 바로 <족보>다”라고 말했다. 정성일에 따르면, <족보>는 풍경보다 한국의 건축 양식에 대해 아름다움을 표하고 있는, 한 마디로 ‘아름다운 영화’다. <족보>는 이른바 ‘임권택 양식’이라고 부를 수 있는 영화의 시작으로 영화의 서사를 위해 생략하고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을 커트하지 않고 그대로 보여준다. 쇼트 자체의 이미지의 아름다움보다 쇼트들이 이뤄내서 갖는 어떤 격, 품격과 맞닿아 있다.

<족보>에서는 씬의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쇼트가 길어진다. 한 쇼트에 무언가 농축된 어떤 느낌이 담겨 있다. 감독은 커트를 잘라서 커트 백 시키는 것에 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길이가 좀 길더라도 그 안에 여백이 있든 어쨌든 그것은 상관없이 좌우간 그 얘기가 갖는 팽팽한 분위기면 분위기, 정적인 아름다움, 정서적인 아름다움이 어슴푸레 살아 있는 부분을 한 쇼트 안에 농축시켜 보려 노력했다고 말한다.

이 영화의 백미는 20분에 달하는 설진영의 장례식 시퀀스다. 감독은 “장례식을 통해 기울어져 가는 조선인들이 갖는 비애, 한국 사람이 갖는 아름다움, 가령 깃발, 만장 이런 것들을 슬프면서도 아름다움이 있는 것으로, 그런 것을 찍고자 했다”고 밝힌다. <족보>의 마지막 장면은 감상성이 배제된 채 ‘슬프면서도 슬프지 않은 감정’을 잘 담아내고 있다. ‘애이불비’로 명명되는 이 한(恨)의 정서는 이후 임권택 영화의 인장(印章)으로 자리매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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