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의병장 ‘이설’ 생가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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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의병장 ‘이설’ 생가 터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25.07.10 06:59
  • 호수 899호 (2025년 07월 10일)
  • 3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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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80주년, 우리지역 항일독립운동 사적지 알기 〈3〉
【의병운동/가옥/멸실/미지정/홍성군 구항면 오봉리 163】

광복 80주년을 맞아 지역의 항일독립운동 현장인 사적지를 탐사, 항일독립유산을 체계적으로 보호·관리·활용하기 위한 발굴·기록·교육·홍보 등을 통해 정신적 유산을 계승, 역사적 가치와 의미가 조명되도록 항일독립유산의 사적·기념물 지정 등의 촉구를 위해 ‘우리 고장 항일독립운동 사적지 알기’를 통한 지역공동체 캠페인을 진행한다. 【사적지명/분류/종류/상태/사적지지정/주소】순 <편집자 주>

멸실 이전의 이설 생가 ‘허허당’의 모습.

복암(復庵) 이설(李偰, 1850.1.24.~1906.4.29.음력)은 충청도 결성현 화산면 봉지동(현재의 홍성군 구항면 오봉리 봉지마을)에서 아버지 이조익(李祖益)과 어머니 광산김씨 김재미(金在美)의 딸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순명(舜命) 또는 순도(舜徒), 호는 복암(復庵)으로 과거에 급제한 이후에 사용했다. 

연안 이씨 소부감판사공파(小府監判事公派)의 제1대조 이현려(李賢呂)의 24세손이고 연평부원군 이귀의 10대손인데, 이귀의 셋째 아들인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이시방 대부터 결성현 화산면(현 홍성군 구항면)에 정착해 세거하기 시작했다. 이설은 이조겸(李祖謙)에 입양됐다. 

“나는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 하였으나 힘이 모자라 도적을 치지 못하였다. 차마 君父가 당한 욕을 말한다면 의리상 살아 있을 수 없어서 춘추필법에 따라 붓으로라도 주륙하려는 뜻을 품고 바야흐로 항의하는 장계를 올리고자 했는데, 그 명분이 의거의 당에서 나왔기에 마침내 체포됐다. 죽음이 있을 따름이요. 다른 할 말은 없소이다.”

이설은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관찰사에게 창의할 것을 권했으나 끝내 거절당하고, 의병을 이끌고 홍주에 집결했으나 창의소를 차린 지 하루 만에 체포된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목숨을 건 상소 투쟁을 전개하고 제2차 홍주의병을 독려했지만, 국권회복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국했다. 

이설은 7살 때부터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읽었고 9살 때부터는 족조(族祖)인 이훈(李壎, 1804~1868)에게 소학을 배웠다. 또한 이돈필(李敦弼)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했고, 1864년 양부 이조겸이 관직을 받고 상경하자 족형(族兄)인 이위(李偉, 1830~1872)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이설은 1866년 병인양요 때 ‘응상동뢰차(凝上冬雷箚)’를 지어 올려 “서양 오랑캐에게 굴하지 말고 척화를 끝까지 고수할 것”을 주장했고, 1878년에는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의 문물이 조선의 경제를 어지럽히고 있는 것을 비판하는 ‘의상척양왜소(擬上斥洋倭疏)’를 올려 “왜(倭)는 서양의 앞잡이(前導)이며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곧 매국행위”라고 규탄했다.

1894년 2월 홍문관 부응교(副應敎:종4품), 사복시 정(司僕寺正:정3품)에 제수됐으나 충주목에 머무르면서 병을 이유로 나가지 않았다. 같은 달 동학 농민 혁명이 일어났는데, 그해 5월 사과(司果:정6품)로서 호남전운사(湖南轉運使) 조필영(趙弼永), 균전사(均田使) 김창석(金昌錫),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 안핵사 이용태, 전라도 관찰사 김문현(金文鉉), 영광군수 민영수(閔泳壽) 등 동학 농민 혁명과 관련한 관료들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튿날 분 좌랑(分佐郞:정6품)에 제수됐으나 병을 이유로 나가지 않았다.

1894년 6월 사헌부 집의(執義:종3품), 사간원 사간(司諫:종3품)에 제수됐으나, 같은 달 9일 일본군이 동학농민혁명으로 위험해진 자국민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인천부에 상륙한 뒤 내정 개혁을 강요하자, 상소를 올려 이를 거부했다. “중화의 맥이 끊어질 수 있으니 이를 지키기 위해 일본과 전쟁을 결행할 것”을 주청하면서 사임했다. 이어 6월 21일 기어이 일본군이 경복궁을 장악하고 김홍집 내각을 조직하면서 그에게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정3품), 우부승지(右副承旨:정3품)를 제수해 고종을 보필하도록 했지만 사양, 나아가지 않고 낙향했다.

1906년 4월 29일, 이설은 끝내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자택에서 56세에 사망,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홍성군 구항면 오봉리 봉지마을 선산에 매장됐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이설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지금은 생가 터에 마을주민이 거주하고 있으며, 정원에는 ‘여허대(如許臺)’라 암각돼 있는 바위가 남아 있다. 돌담과 생가주춧돌, 100년 세월의 향나무는 아직 남아 있다.
우측면에서 바라본 이설 생가 터.
이설 생가 터에 남아 있는 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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