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내공에 세대의 감각을 더하다
[홍주일보 홍성=이정은 기자] 연둣빛 싹이 초록 숨을 내쉬며 자라나 황금빛으로 넘실대더니, 이제는 한 해를 비운 그루터기가 되어 흙의 품으로 돌아가고 있다. 침묵하는 들판 위로 눈발이 내려앉던 지난 18일, 금마면 내기마을에 자리한 ‘정섭이가(家)(대표 이진규)’를 찾았다.
일전에 ‘쇠고기버섯불고기’를 맛본 기자는 이번엔 ‘쇠고기열무비빔밥’을 주문한 뒤, 좌측으로 고개를 돌린다. 한쪽 벽면의 커다란 통창으로 정감이 내다보인다. 굽이진 시골길을 따라 야트막한 함석지붕과 벽돌집들이 나무와 하나된 듯 심겨진 풍경, 그 사이로 허리 굽은 할머니가 구루마를 끌고 지나간다. 낮게 흐르는 바람은 얼룩진 이파리를 흔들고, 텃새가 날아와 덜 여문 주홍색 열매를 내려다본다. 마치 오래전에 받은 편지를 다시 펼치는 듯한 따스함이, 유리 너머에 담겨 있다.
우측, 봄·여름·가을·겨울이라 이름 붙은 룸은 통창 풍경과 하나로 이어진다. 그러나 유리 너머는 사계(四季)만이 아닌 곱절의 계절을 보여줄 것이다. 늦가을의 모습에 눈발이 흩날리는 지금처럼, 자연은 지금과 다음 사이를 빼놓지 않고 이어지므로. 가을 같기도 겨울 같기도 한, 사이의 시간이 재생된다.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는데, 어느새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독상차림으로 서브된 쟁반엔 모두 일곱 개의 그릇이 놓여있다. 먼저, 비빔밥 그릇에 담긴 다진소고기·열무김치·다시마튀각에 윤기 흐르는 찰진 밥을 넣고 한데 버무린다. 저마다 다르게 양념된 재료들이 만나 따로 고추장을 넣지 않아도 딱 알맞은 간을, 조화로운 맛을 완성시킨다. 그다음, 새우젓의 감칠맛이 은근히 스민 슴슴한 뭇국으로 입을 헹군 뒤 샐러드에 젓가락을 옮긴다. 양상추, 양배추, 적채, 방울토마토에 상큼하고도 향긋한 유자 드레싱이 끼얹어져 입맛을 깨운다. 그리고 남몰래 감탄한 녹두전은 기름에 부쳤다기보단 오븐에 구워낸 듯 담백하고 고소한 맛이 가히 일품이다. 거기에, 오이지무침으로 먹는 재미를 부여한다. 꼬독한 식감과 씹을수록 퍼지는 쿰쿰함이 매력인 오이지는 입안에 녹두전이 머물 때, 뒤따라 들어와 사이좋게 어우러지면서도 보란 듯이 존재감을 드러낸다. 또 샐러드 못지않은 백김치는 톡 쏘는 시원함으로 입을 헹구는 동시에 식욕을 부추긴다. 이 모두가, 요리 고수의 치밀한 계산이 숨겨진 듯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전에 맛본 ‘쇠고기버섯불고기’ 또한 독상차림이었다. 오이지무침과 녹두전은 비빔밥 상차림과 동일하다. 정섭이가의 불고기는 무쇠 전골냄비에 나오기 때문에 익힘 정도를 개인의 취향에 맞게 조절해 먹을 수 있다. 불고기 150g, 3가지 버섯(느타리·팽이·표고)과 알배추, 양파, 대파 등의 채소가 함께 끓어오른다. 참기름이 가미된 노른자 소스에 푹 찍어 맛보면, 짭조름한 맛과 부드러운 풍미가 혀에 착 감기며 입안을 가득 채운다. 여기에 또 다른 맛이 추가된다. 달큰하고도 구수한, 바로 보리강된장과 양배추찜이다. 비빔밥에 백김치가 나왔다면, 불고기엔 포기김치다. 이 김치 또한 깔끔하면서도 맛깔스럽다. 그릇에 담긴 전부가 잠시도 수저를 내려놓을 수 없게 만든다. 기자가 마음속으로 섭외를 결정짓던 그때, 다른 테이블에서 식사 중이던 손님이 말한다.
“여기 김치 좀 더 주세요.”
이진규 대표는 1989년부터 23년간 한식당 ‘종가’를 운영했던 탤런트 이정섭 씨의 장남이다. 그는 아버지의 레시피를 토대로 자신만의 아이디어를 더해, 지난 8월 1일 ‘정섭이가’를 열었다. 이 대표는 3월부터 6월까지 3개월간 손수 인테리어를 하고, 7월 한 달 동안은 지인들을 초청해 품평회를 진행하는 등 가오픈 기간을 거쳤다. 그렇게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8월 1일 정식으로 문을 연 것이다.
그동안 아버지의 비결이 담긴 김치를 비롯해 다양한 식품류를 온라인과 홈쇼핑을 통해 선보여 왔던 이 대표는, 보다 많은 이들에게 아버지의 손맛과 내공이 깃든 서울식 반가(班家) 음식을 소개하고자 오프라인 매장을 준비하게 됐다.
이정섭 씨는 한식당 운영은 물론이고 요리프로그램 진행과 4권의 요리책을 출간했을 정도로 수많은 레시피를 보유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정섭이가’에서 가장 먼저 선보인 메뉴는 한식정찬코스와 쇠고기버섯불고기, 쇠고기열무비빔밥, 녹두전 등의 단품 요리다. 한식정찬코스는 샐러드·탕평채·냉제육·문어숙회·너비아니구이·알도가니무침·녹두전·식사로 구성되며, 하루 전 예약을 통해 즐길 수 있다.
“아버지의 레시피가 워낙 많지만, 아직은 시작 단계라 우선 이 정도로 출발했습니다. 앞으로 하나씩 메뉴를 추가해 나갈 예정이고, 연말이나 연초쯤에는 코스 메뉴도 확장할 계획입니다.”
주방과 홀을 오가며 분주한 이 대표를 대신해, 정섭이가의 뿌리이자 원류인 이정섭 씨와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박리다매식 음식은 할 줄 몰라요. 제대로 된 음식을 만들어 제값에 팔자 주의예요. 일단 좋은 재료를 사용하고 거기에 들어갈 양념이 빠짐없이 다 들어가야 내 입에 맛있는 음식이 나와요. 그래야 손님들께도 대접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게 제 원칙이에요.”
‘남자는 부엌에 들어가선 안 된다’는 인식이 보편적이던 시대, 그는 중학생 때부터 어른들 몰래 부엌에 들어가 요리하는 걸 즐겼다. 그러던 어느 날, 이정섭 씨는 실수를 통해 ‘밑간’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그날도 부엌에서 몰래 도라지를 무쳤는데 너무 짜더라고요. 그래서 물에 헹구고 다시 무쳤는데, 한 번 양념이 스며든 도라지라 그런지 맛이 훨씬 좋더라고요. 그때 알았어요. 밑간이 되면 음식 맛이 더 좋아진다는 걸요.”
이정섭 씨는 “남들이 잘하는 걸 좇는 건 결국 흉내 내기일 뿐”이라며, 소문난 맛집을 좇기보다는 직접 길을 찾아 나서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혀끝으로 스스로의 기준을 세우며, 자신만의 요리 기술을 다져왔다. 그는 요리라는 하나의 주제 아래 수많은 가지를 뻗어나가듯 다양한 음식을 나열하며 이야기를 풀어냈고, 그 속에서 그의 음식 철학이 자연스레 드러났다.
“머릿속에 있는 메뉴만 해도 끝이 없어요. 지금 당장 생각나는 것만 말씀드리자면 족편, 신선로, 북어튀김, 방자구이, 보쌈김치, 장국밥 같은 것들이 있어요. 제가 또 자신 있는 게 나물비빔밥인데, 일곱 가지 이상의 나물이 들어가거든요. 손이 많이 가는 만큼 정성이 들어간 비빔밥이에요. 그리고 저는 웬만해선 설탕을 사용하지 않아요. 식재료를 통해 단맛을 끌어내죠. 무엇보다도 음식은 먹고서 약이 돼야 하잖아요. 그래서 음식을 만들 적엔 뭐든지 허투루 하면 안 돼요. 손님들이 식사를 하시고 나서 ‘정성을 먹었다’는 느낌이 드시게끔, 그렇게 해야죠.”
나물비빔밥은 그저 예시일 뿐, 그는 모든 음식에 시간과 정성을 들여 레시피를 완성해 왔다. 이정섭 씨는 음식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온도’를, 그다음으로는 ‘간’을 꼽는다. 또한 재료의 성질을 정확히 파악해 그 특성에 맞게 다룰 줄 알아야 하며, 각각의 재료가 서로 어우러질 수 있도록 색과 맛의 조화와 궁합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섭이가에선 코스 메뉴 중 알도가니무침에 쓰이는 스지를 제외하곤 모두 국내산 재료를 사용하고 있으며, 뭇국에 들어가는 새우젓과 튀각에 쓰이는 다시마를 광천시장에서 사들이는 등 최대한 지역의 재료를 소비하고 있다.
“쌀은 정미소에서 갓 도정한 걸 그때그때 사용하고 있어서 밥이 찰지죠. 육젓의 경우 깊은 맛이 장점이긴 하나, 비빔밥이 이미 간이 돼서 무거운데 국까지 깊으면 지나치게 무거워지기 때문에 전체적인 균형을 위해 추젓으로 맛을 내고 있어요. 오이지도 직접 담그고 김치도 제 레시피로 만드는 거예요.”
‘정섭이가’에서의 식사는 두 세대의 손끝에서 빚어진 내공과 정성이 배어든 미식의 경험이다. 하나둘 추가될 종가의 비법이 깃든 메뉴들은 정섭이가의 식탁을 더욱 깊고 풍요롭게 만들 것이다. 그러는 동안, 주방에선 변함없는 정성의 온기가 이어질 것이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이정섭 씨의 레시피로 담근 김치는 정섭이가의 홈페이지(https://jeongseobi-ga.com)를 통해 구매할 수 있다.
◆정섭이가 메뉴
△한식정찬코스(1일전예약) 50,000원(오픈기념특가) △쇠고기버섯불고기 20,000원(평일점심특가)/25,000원 *불고기 150g 추가 15,000원 △쇠고기열무비빔밥 15,000원(평일점심특가)/18,000원 △녹두전(3장) 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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