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1960년대 말 ‘홍성직업소년학교(洪城職業少年學校)’를 알고 계십니까. 1960년대 중반인 1964~1965년 홍성지역에서 최초로 당시 홍성고등학교 재학생들에 의해 시작된 야학 ‘청석중학원’과 ‘양지중학원’을 알고 계십니까.
홍성지역에서 지금은 잊혀진 향토애에 부푼 교육의 현장, 흙의 사제로 불리던 20대 청년의 ‘지게꾼 선생님과 10대의 학생들이 일궈낸 홍성교육 기적의 현장을 말입니다.
“1969년 8월, 서울의 젊은이들이 무더위를 피해 산과 바다를 찾을 때 ‘배움의 길을 개척해 보자’는 시골의 젊은이들이 서울을 찾아 한여름 복더위에 땀을 흘리고 있다. 충남 홍성군 홍성읍 대교리에 있는 ‘홍성직업소년학교’ 정덕영(鄭德泳·26) 교장과 이상근(李相根·26) 교감 등 청년 교사와 16명의 청소년 학생들은 ‘우리 배움터는 우리 손으로 마련하자’고 지난 3일 상경, 중구 도동 1가 성남교회에 잠자리를 얻자 교장과 교감은 지게꾼으로, 남학생은 신문팔이로, 여학생은 모금함을 들고 서울역 광장으로 나가 바캉스 인파 속에서 교실 신축비를 마련하기 위해 땀을 흘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1969년 8월 20일 자 조선일보(朝鮮日報)는 ‘放學중 5都市 遠征(방학중 5도시 원정) 제하에 -敎師(교사)·學生(학생) 48名, 국수 두 끼로 하루 20時間(시간) 重勞動(중노동)-이란 부제를 달고 ‘바캉스 인파 속에 땀 흘려 배움터를 세우는 홍성직업소년학교’에 대한 기사가 보도됐다. 이 기사는 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조선일보(朝鮮日報)’ 편집국장을 지낸 당시 장정호(張廷鎬) 사회부장이 1969년 8월 20일 자 신문에 8단 기사로 집필한 기사의 머리글과 제목이다.
■ 소향리 움막교실서 대교리 천막교실로
보도 내용에 따르면 “이들의 일과는 새벽 4시 통금(통행 금지)이 풀리면서 시작돼 밤 12시 통금시간이 될 때까지 계속되고 있다. 날씨가 더워 잠자리는 그다지 불편이 없지만 목표 달성을 위해서 허리띠를 쥐어 매야 하는 것은 적기 고충, 20원짜리 막국수 두 끼로 식생활을 해결하고 있는 것이다. 잠자리에 들면 하루의 고된 피로가 온몸을 엄습하지만 하루하루 돈 가방이 불어나는 것을 볼 때 이들은 벅찬 희망에 가슴이 부푼다고 했다. ‘우리에게 배움터를 주세요.’라고 쓴 모금함을 들고 13일째 거리를 헤맨 주영숙(朱英淑·15) 양은 ‘서울분은 인심이 좋으세요…’라고 하면서 보람을 느끼고 있다. 주 양이 지금까지 모금한 하루의 최고액은 3천5백원.
이상은 교감은 ‘처음 6㎞ 되는 거리에 지게를 지고 가서는 품삯으로 1백원을 받았는데, 돌아와서 보니 본토배기 동료 지게꾼이 핀잔을 주더라’면서 ‘그러나 지금은 적당한 노임을 받아낼 수 있다’고 웃음을 머금었다.”고 보도하면서 “홍성직업소년학교는 향토를 깨우쳐 잘살아보자는 노력으로 세워졌다. 5년(1964년) 전 현 정덕영 교장은 홍성고교 3학년에 다닐 때, 어느 날 5·16 민족상 사회부문 수상자인 한인수(韓仁洙·34) 수상자가 학교를 방문해 학생들에게 ‘한국의 젊은이들이 지역사회 개발에 앞장서야 한다.’고 역설했는데, 이때 정덕영은 한인수 수상자의 정열에 느낀 바가 있어 즉시 뜻을 같이하는 홍성고 1~3학년에 재학하는 벗 45명을 규합해 ‘양지회’라는 모임을 만들고 ‘우리 고장을 위해 우리의 모든 것을 바치자’며 ‘흙의 아들’이 될 것을 맹세했다.
이들은 여름방학 동안 농촌계몽운동을 나갔을 때 적지 않은 시골의 어린이들이 배우지 못하고 가난과 질병 속에서 허덕이고 있는 참상을 직접 목격하게 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정덕영은 부모님이 대학 진학을 위해 마련해 준 당시 3만 5000원을 가지고 홍성읍 소향리의 산속으로 들어갔다. 1965년 4월 부락 근처의 산에 22평짜리 움막집을 짓고 학생들을 모았다. 처음에 45명의 불우한 학생들이 모였다. 정덕영은 이날부터 자신이 만든 ‘중학강의록’을 들고 어린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고등학교에 재학할 때 같이 ‘양지회’를 이끌었던 이상은(26), 심재욱(26), 김창규(24), 최덕규(25) 등의 친구들이 정덕영과 같이 일하겠다고 찾아왔다. 1965년에는 첫 졸업생 4명을 배출했는데, 모두 국가 검정고시에 합격, 읍내의 정규고등학교 등에 진학했다.
이 소식은 소향리, 월계리, 오관리 등 인근 마을에 퍼졌고, 이곳에서 학생들이 속속 찾아왔다. 학생들이 늘어나자 움막교실은 좁았다. 교사들은 학교 운영비용을 마련하려고 오후에는 읍내에 나가 빵장수와 신문팔이 등을 했다. 이 광경을 본 당시의 홍성경찰서 이흥세(李興世) 서장의 주선으로 재일교포인 김재규(金載珪)씨가 성금 5만 원을 정덕영 교장 앞으로 보내와 텐트 1개를 구입했으나 늘어난 학생 232명(남학생 127명, 여학생 105명)을 모두 수용할 수는 없었다. 교사들과 학생들은 여름방학 전인 7월 25일 전체회의를 열고 교사 전원과 2학년생 48명을 5개 조로 나누어 8월 1일부터 27일까지 서울을 비롯해 부산, 대구, 광주, 청주 등 5개 도시에 나가 교실신축비용을 자신들이 땀 흘려 벌어들이자고 결의, 각 조는 지난 8월 1일부터 각자 목표한 도시로 향했다. 정덕영 교장과 학생들은 “지금의 상황대로라면 우리의 교실은 우리의 힘으로 완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대단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고 당시 언론은 보도했다.
■ 모금함 든 배움터, 남장리에 학교신축
홍성직업소년학교 정덕영 교장 등 20대의 젊은 교사들은 지난 1969년 8월, 여름방학 기간 한 달 동안 지게를 지고 서울을 찾았고, 어린 소년들 45명은 모금함을 들고 전국을 헤맸다.
한 달 동안 모인 돈은 꿈에도 생각 못 할 100만 원, 여기에 당시 홍종철(洪鍾哲) 문교부장관이 30만 원의 성금을 선뜻 내놓은 것을 비롯해 각계에서 아낌없는 성원을 보내왔다. 학교신축추진위원회(신경희, 申景熙)는 ‘시멘트’ 1200부대를 마련했고, 3관구 사령부 대전 대공분실에서는 ‘트럭’과 ‘불도저’를 지원, 지난 1969년 11월 6일 홍성군 홍성읍 남장리 산 103의 2300평 대지에 감격스러운 학교신축 기공식을 가졌다. 공사비를 아끼기 위해 전문분야만 전문가에게 맡기고 전교생 480명과 교사들은 인부가 되어 학교신축에 나섰다. 벽돌을 쌓고 흙을 다져 교실 7칸의 외곽공사를 지난 1970년 3월에 끝냈다. 하지만 아끼고 아끼던 공사비는 바닥이 났다. 교실 바닥 콘크리트는 물론 창문과 책상, 칠판 등을 마련하지 못한 채 4개월 동안 공사가 중단됐다. 480명의 학생들은 거의 완공되던 학교를 떠나 홍성읍 대교리 1구의 비어 있는 천주교회와 전도관에 분산, 30평의 건물에 200여 명씩 콩나물 수업을 받아야 하는 현실에 직면했다.
1964년 홍성고등학교 재학시절부터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섰던 정덕영(鄭德泳) 교장은 “수 많은 사람들의 정성스런 성원도 보람없이 공정의 10% 정도를 남겨놓고 공사비 100만 원이 부족해 공사를 중단, 어린 학생들을 실망시키고 있는 것이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어린 몸으로 지난해 여름 서울의 거리에서 모금함을 들고 배움터 마련을 호소했던 김기숙(金基淑·15) 학생은 ‘긴 장마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모금을 했던 그 정성은 헛되지 않아 우리 학교는 꼭 완성될 것”이라며 “그때 사용했던 지게와 모금함은 학교의 역사와 함께 길이 남아 후배들에게 눈물겨운 본보기가 될 것”이라고 인터뷰를 하는 야무짐을 보이기도 했다고 신문은 보도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홍성직업소년학교는 1969년까지 105명의 졸업생들 중 고등학교 검정고시에 23명을 합격시킨 것을 비롯 47명을 도시와 농촌의 직장으로 보냈고, 나머지 35명을 지역개발의 일꾼으로 길러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62~1967년 홍성고등학교 재학시절 양지회(陽地會) 회원들과 ‘청석중학원’과 ‘양지중학원’의 야학 과정을 수강한 분들의 연락을 기다립니다. 또한 홍성재건학교, 홍성직업청소년학교, 복지중학교, 청석수련원 등에서 교육을 받았거나 관련 내용을 알고 계신 분, 관련 자료나 사진, 앨범 등을 소유하고 계신 분, 기타 홍성지역의 재건학교, 고등공민학교 등과 관련된 제보를 기다립니다.
-홍주일보·홍주신문 편집국(대표전화 041-631-8888, 우편 32278 충남 홍성군 홍북읍 홍북로573번길 83)으로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