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광복 전후 우리 고장의 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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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광복 전후 우리 고장의 실상
  • 전하수(홍주향토문화연구회 고문)
  • 승인 2013.08.13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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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35년간의 민족적 시련을 극복하고 마침내 해방의 기쁨을 누린지 65년이 지났다. 일제 강점기를 겪지 않은 세대들에게 당시 9살 초등학교 2학년생이 겪었던 홍성지역에서 일제의 수탈상을 전한다.

'식량의 강제 공출(供出)'
일제는 본국의 식량부족과 군량미(軍糧米) 확보를 위해 매년 가을 농민들이 생산한 벼를 시가보다 턱없이 낮은 가격으로 공출했다. 일제가 공출량을 각 마을별로 할당하면 자진해 목표량을 달성해야만 했다. 만일 목표량에 미달한 마을에는 공출 독려반이 각 농가를 수색해 아무런 보상도 없이 쌀을 공출해갔다. 당시 우리 집은 대농가로 우선 대상자가 되므로 미리 벼 몇 섬씩을 감췄다. 부엌(5평 규모)이 커서 나무를 쌓아두는 나뭇간 밑에 1.5평 정도의 넓이로 흙을 파내고 그 안에 볏섬이나 큰 독을 묻어 벼를 감춰 식량을 저장했는데 독려반에 발견돼 모두 강제로 공출해갔다.

'놋그릇 강제 수탈'
일제 말기는 1942년경부터 무기(탄피) 제조용으로 사용키 위해 놋그릇마저 전쟁 물자지원이란 이름으로 강제로 수탈했다. 우리 집은 제기와 향로 등도 모두 수탈당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1944년 한 겨울날 내 할아버지의 내외가 식기로 쓰던 놋그릇을 빼앗아 가기 위해 순사와 면직원이 들이닥쳤다. 할아버지는 화를 내며 식기를 문 밖에 내 던졌는데 그들은 유기그릇을 주워갔다.

'송탄기름제조 공출'
송탄기름은 소나무에서 추출하는 것으로 테레빈유로 정제해 당시 비행기 연료로 사용되었다. 주로 산을 소유하고 있는 집에서 강제로 공출했다. 송탄기름은 소나무옹이를 잘라다 큰 드럼통을 잘라 솥걸듯 걸어 놓고 밑에서 불을 씌워 기름을 받아 이를 수거해갔다. 또한 큰 소나무 밑둥치 1m높이에 흠집을 내어 송진을 받아 공출하기도 했다. 지금도 결성면 읍내리 석당산에 몇 그루가 그 흔적을 고스란히 갖고 있다.

'목화 재배 면화 공출'
당시는 자기 밭이라도 마음대로 작물을 재배하지 못하고 관에서 지정해 주는 것을 심어야했다. 그중에 일제가 지정한 주요 작물이 면화였고 일정량을 공출해야 했다. 그러나 무명이나 솜옷, 이부자리 등 가정에서 쓸 면화도 필요해 공출을 피해 몰래 솜을 타야했다. 당시 솜틀집이 있었으나 낮에는 단속이 심해 주로 야간을 이용했다. 각 농가에서 씨앗시(목화씨 빼는 기구)란 기구를 이용하는데 이 기구에서는 큰 소리가 나 저녁에만 사용하였으니 정말 지옥 같은 삶을 살았다.

'금·은 등 지하자원 채굴'
일제는 우리나라의 지하자원을 모두 쓸어가다시피 채굴해 전쟁물자를 조달했다. 우리 지역의 금은광은 서부면 판교리 소재 결성광산, 광천읍 담산리 황보광산, 홍북 중계리 금탑광산, 금마면 화양리의 금마광산, 장곡, 대현리 대현 광산이 있었다. 광천읍 산정리와 구항면 마온리에는 석면광산이 존재했다. 당시 광산의 광업권은 대부분 일본인이 가졌다. 우리나라 사람은 광산 경험이 있는 몇몇 사람이 덕대란 이름으로 일부 광권을 갖고 광산에 종사했지만 돈을 벌었다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당시 광부들도 중노동에 저임금으로 노예와 같은 생활로 생계를 유지하고 살았다.

이 글을 통해 일제 강점기를 직접 경험하지 않은 세대들에게 간접적으로나마 당시의 사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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