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 고향 ‘홍성’ 인지도 높일 절호의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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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 고향 ‘홍성’ 인지도 높일 절호의 기회
  • 김혜동 기자
  • 승인 2014.06.13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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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거 70주기 맞아 기념사업 활발… 군민 참여·홍보 절실


만해 한용운은 백야 김좌진, 고암 이응노, 명무 한성준, 매죽헌 성삼문, 최영 장군, 남당 한원진, 지산 김복한 등 홍성이 배출한 수많은 위인 중 한 명이다. 만해는 독립운동가, 민족시인, 종교인으로서 조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민중의 선봉에 서며 조국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쳤던 인물로 전해지고 있다. 만해 한용운은 1879년 8월 29일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박철동에서 한응준(韓應俊)과 온양 방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주이며 자는 정옥(貞玉), 속명은 유천(裕天), 법명은 용운, 법호는 만해(萬海, 卍海)이다.

현재 만해의 행적에 대한 각종 연구자료와 기록들을 살펴보면 그가 25세가 되던 1904년 만해의 맏아들인 한보국이 태어났고 그 후 25세를 전후해 홍성을 떠나 강원도 건봉사로 건너가 그곳에서 최초의 선 수업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만해가 불교계에 입문한 것은 29세이던 1907년이다. 만해는 당시 고향 홍성을 떠나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 설악산 백담사 등을 전전하다 마침내 백담사에서 스승인 김연곡에 의해 계를 받는다.

30세인 1908년에는 강원도 유점사에서 화엄경을 수료하고 이듬해에는 강원도 표훈사에서 불교 강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만해는 송광사, 범어사, 통도사 등 권위 있는 사찰을 두루 거쳤고 36세 되던 1914년에는 불교강구회 총재를 맡아 범어사에서 ‘불교대전’을 펴냈다. 또 같은 해 조선불교회 회장으로 취임하고 영남, 호남 지방의 사찰을 돌면서 곳곳에서 강연회를 열며 열변으로써 청중들을 감동시켰다.

1918년까지 오세암에 머물던 만해는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이후로는 독립운동에 집중하다가 43세 되던 해 함께 독립운동을 하던 최린, 함태영, 오세창 등과 출옥한 이후 불교의 사회화를 위한 법보회를 발기했다. 같은 해 ‘철창철학’, ‘육바라밀’ 등을 주제로 청년들을 대상으로 대중불교를 기초로 한 독립사상에 대한 강연을 이어나가며 불교대중화와 민족독립의식 고취에 앞장섰다. 만해는 1920년대에는 대처승 운동을 주도하여 중에게도 결혼할 자격, 결혼할 권리를 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독립운동가로서 만해의 대표적 족적은 역시 3·1운동과 ‘독립선언서’ 낭독이다. 기미년 3·1운동은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을 외친 쾌거이자 민족의 저력을 다시한번 세계만방에 유감없이 표현한 대 민족운동이었다. 만해는 거사 당일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에 공약 3장을 덧붙였고 만세 삼창을 선창하며 “이제 내 나라에서 죽으니 한이 없다”는 말을 남겼다. 3·1운동과 독립선언문 등으로 경찰에 체포돼 3년형을 선고받은 한용운은 갖은 고문을 당하지만 끝내 굴복하지 않고 옥중에서 ‘조선독립의 서(書)’를 집필하며 조국의 독립을 염원했다.

만해는 출옥 후 일생에 걸쳐 징용이나 보국대 또는 황병을 찬양하는 글을 쓰지 않은 것은 물론 일체의 강연도 하지 않았다. 한때 독립운동에 앞장서기도 한 최남선과 이광수를 비롯한 거의 모든 문인이 끝내 변절하고 말지만 그만은 다른 면모를 보였다. 만해는 불교 개혁, 조국 독립운동의 족적과 더불어 한국문학사에서 근대 문학을 이끈 저항시인으로 평가 받고 있기도 하다. 그는 대표작인 ‘님의 침묵(1926년)’을 비롯해 시조와 한시를 포함해 모두 300여 편에 달하는 시 작품을 남겼다. 만해의 문학은 일제강점기라는 당대의 한계로 인해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조선의 독립을 갈구하는 자신의 심중을 은유적 수법으로 드러내며 조국 독립의 염원을 문학작품에 고스란히 녹여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올해는 만해가 영면에 든지 70년이 되는 해이다. 홍성군에서는 홍성문화원을 중심으로 만해 한용운의 업적을 체계적으로 선양하기 위해 ‘만해기념사업회’를 발족시키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고 오는 8월에는 서울 성북구 심우장, 예산 수덕사와 함께 대대적인 ‘만해추모제’를 거행키로 했다. 기념사업회가 정식 출범하면 만해의 고향인 홍성의 정통성을 내세워 보다 체계적인 각종 사업들이 추진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그러나 만해 한용운의 고향으로서 홍성의 대내외적 홍보는 아직까지 미약하기만 하다. 국민 대부분은 만해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그가 수도에 정진했던 백담사를 생각하는 것이 현실이다. 때문에 올해 만해 서거 70주기를 맞이해 홍성문화원과 홍성군 등이 추진하는 선양사업들에 군민들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만해가 홍성군민들만 아는 이 지역의 역사인물 중 한명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한 새로운 도약의 해가 될 수 있도록 온 군민의 관심과 노력이 집중돼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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