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사울성지 성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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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사울성지 성당은…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14.07.17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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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사울 신앙공동체는 내포 천주교회의 발상지가 되면서 박해의 중심지가 됐다. 1791년 신해박해, 1801년 신유박해에 이어 1839년 기해박해 등 수난의 역사가 계속됐다. 특이한 점은 일부 공동체의 경우 박해가 집중되면 남은 신자들은 위협을 피해 흩어지거나 이주하면서 와해되는 일이 많았지만 여사울은 그렇지 않았다. 이후 1866년 병인박해 시기에도 여전히 순교자들이 발생하는 등 꾸준히 명맥을 유지해온 것이다.

이존창은 서울에서 한국천주교 창설멤버였던 권일신 신부에게 교리를 배웠으며, 1786년 세례를 받고 평신도 사제직이라고 할 수 있는 가성직(假聖職) 신부로 임명됐다. 이후 고향에 내려와 김대건(1821~1846)의 종조부 김종현, 조부 김택현을 비롯해 여사울 지역에 복음을 전했다. 최양업(1821~1861) 신부 집안과도 혈맥관계여서 두 집안 뿐 아니라 풍산홍씨 집성촌인 여사울 지역에 활발히 복음을 전했다. 1850년대 당시 한국 신자들은 대부분 이존창이 입교시킨 사람들의 후손들이었다고 전해질 정도로 그의 전교상의 공헌은 지대하다. 여사울에서는 성인 2위, 복자 9위, 순교자 12위가 나왔는데, 성인 반열에 오른 홍병주·영주 형제 등이 이존창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존창은 1791년 신해박해 때 모진 고문과 매질에 배교했으나, 다블뤼 주교는 “루도비코는 1791년에 배교하긴 했지만, 다시 열심히 신앙을 실천하고 새로 예비 신자의 수를 늘리는 데 힘썼다”고 묘사하며 한순간의 실수를 너그러이 인정해줬다. 이후 전교에 힘쓰다 1795년 다시 체포돼 옥살이 하던 중 1801년 공주 황새바위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여사울 성당 윤인규 주임신부는 “여사울은 천주교 초기 신앙공동체로 1866년 병인박해 때까지 신앙의 맥이 이어진 유서 깊은 성지”라고 소개하면서 “고통 받고 가난한 이들의 벗으로 불리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대전 월드컵경기장에 가실 때 이곳을 스쳐 지나가게 되는데, 그래서 길가에 커다란 환영 현수막을 내걸었다”고 기쁨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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