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시리즈2(담배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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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시리즈2(담배예찬)
  • 윤여문<청운대 교수 ·칼럼위원>
  • 승인 2014.08.22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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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증의 관계다. 이십년 이상을 담배와 함께 하고 있으니 애증의 관계란 표현이 적절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커피 잔을 들고 아파트 1층으로 내려가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온다. 아파트 쓰레기 분리수거장 근처의 가장 으슥한 곳이 나의 흡연 장소이다. 밤새 부족했던 니코틴을 폐부에 차곡차곡 쌓아놓고자 담뱃불이 필터에 닿을 때까지 알뜰하게 피운다. 때마침 음식물 쓰레기를 가지고 나온 아주머니를 만나기라도 하면, 나는 나쁜 짓을 하다가 갑자기 들켜버린 어린 아이처럼 흠칫 놀라며 스멀스멀 반대방향으로 걸어간다. 혹시, 내가 뿜어낸 담배 연기가 바람에 실려 그 아주머니에게 가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면서 한껏 긴장한다. 야구모자와 슬리퍼 차림으로 쓰레기 분리수거장 주위에서 담배를 피우는 내 모습이 스스로 비참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자기 연민보다 더 매력적인 것이 이른 아침의 담배 맛이다.

일반적으로 피우는 담배는 4000여 가지의 유해 물질과 60여 가지의 발암물질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쯤 되니 ‘백해무익한 물질’이라는 무시무시한 별명이 이해가 간다. 아파트 베란다에서의 금연은 물론이거니와 금연 빌딩, 금연 공원, 금연 거리 등 흡연자들이 설 자리는 계속 좁아지고 있다. 타인에게 해를 줄 수 있는 공공장소에서의 흡연은 제한되어야 한다는 국가정책에는 전적으로 동감하지만, 마치 일반적인 흡연자들이 무작정 죄인 또는 미개인 취급 받는 현실은 다소 아쉽다. 그렇다면 나를 포함한 수백만 명의 흡연자들은 현재 죄를 짓고 있는 중이거나 이미 죄인이란 말인가.

‘행복’이라는 개념이 때로는 ‘건강’이라는 개념과 상충되는 경우가 가끔 있다. 이를테면, 어느덧 멋진 남자로 성장한 아들과 단둘이 포장마차에서 마시는 대여섯 병의 소주처럼 말이다. 다음날 과음으로 고생할지언정 남자끼리의 대화에 무익(!!)한 술은 아이러니하게도 ‘행복’이나 ‘대견함’ 또는 ‘뿌듯함’이라는 개념으로 바뀌기도 한다. 이처럼 담배는 많은 예술가와 일반인들에게 창작의 고통이나 일상의 스트레스에서 잠시나마 위안을 주는 ‘좋은 물질’이기도 하다. 흡연자들은 담배를 피우는 그 순간만큼은 ‘행복’, ‘위안’, 또는 ‘휴식’이라는 단어로 설명해도 좋을 소박한 시간을 영위할 수 있다.

조선시대 정조는 “정사의 잘잘못을 고민할 때, 복잡하게 뒤엉킨 생각을 청명하게 바라보고 요점을 잡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담배의 힘이다”라고 찬양했다. 더 나아가 소설가 김동인은 “백리(百利)는 있고 일해(一害)는 발견되지 않는 것”이라며, “생각이 막혔을 때, 근심이 있을 때, 권태를 느낄 때, 피곤할 때, 덥거나 추울 때” 담배의 효능이 대단하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애연가 중 최고의 지존은 시인 오상순(1894∼1963)이다. 얼마나 담배를 좋아했으면, 원래 사용하던 ‘선운’이라는 호(號)를 버리고 담배꽁초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공초’를 호로 삼을 정도로 담배를 사랑했다. 하루에 평균 9갑(180개비)을 피웠다는 오상순은 아침에 일어나 세수할 때도 한 손으로 담배를 들고 있어 다른 한 손으로만 세수를 하였고, 결혼 주례를 맡았을 때도 담배를 물고 주례를 봤으며, 밥을 먹을 때도 밥상에 꺼지지 않은 담배가 자리했다고 한다. 담배가 아니면 선물을 절대 받지 않았던 그의 묘비 앞에는 재떨이가 설치되어 있고, 묘비명에는 ‘몹시 담배를 사랑하다’라는 간단명료한 글귀가 새겨져 있다고 하니 그의 인생에서 담배가 차지했던 비중을 대략 짐작할 수 있겠다.

이렇듯 담배는 ‘행복’, ‘위안’, ‘휴식’ 등 다양하고 다원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단순히 ‘건강’이라는 일원적인 잣대로 정의하기에는 다소 부적절한 주제임에 틀림없다. 수십 년간 몸담았던 직장에서 사표를 결심한 가장이, 뙤약볕에서 고단하게 일하고 잠시 그늘 밑에서 땀을 식히는 농부가, 지지부진한 창작의 고통을 마무리한 예술가가, 죽마고우의 이른 죽음을 맞이한 친구가, 인생의 쓴 맛을 겪고 좌절하는 젊은이가 피우는 한 개비의 담배를 우리는 굳이 ‘백해무익’ 또는 ‘죄인’이라고 단정해야만 할까. 정조의 한탄이 생각난다. “유독 이 풀(담배)만은 천한 것으로 여겨 대접이 몹시 각박하다. 그래 이 풀이 그렇게도 부정하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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