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성 박월규 할머니의 100년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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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성 박월규 할머니의 100년 인생
  • 김현선 기자
  • 승인 2014.11.07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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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지난달 27일, 올해로 결혼 81주년을 맞은 부부가 있다. 그 주인공은 결성면 성남리 신리마을의 박월규(99)할머니, 최효창(97)할아버지다. 박 할머니는 이번달 백수(白壽)잔치를 앞두고 있다. 한 세기 가까운 시간을 함께 해 온 부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왼쪽부터 큰손자 최찬호(51), 박월규(99)할머니, 최효창(97)할아버지, 큰며느리 이연순(79)

부부가 혼인을 올리게 된 건 할머니 나이 열여덟, 할아버지 나이 열여섯이었을때였다. 8남매 중 막내딸로, 위로 오빠만 다섯이던 할머니는 어머니로부터 예쁨을 많이 받고 자랐다. “그때 마을에 통나무로 된 외나무다리가 있었어. 그 다리를 건너다녀야 했는데, 어머니가 항상 ‘꼭 붙잡아라, 죽는다’면서 챙겨주셨던 기억이나” 딸이 귀한 집에서 자란 할머니 댁에 뜻하지 않은 불행이 닥쳤다.

조카딸이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할머니 어머니는 딸을 일찍 시집보내리라 생각했다. 그러던 중 할머니의 고모 되시는 분이 중매를 섰다. 딸을 좋은 집에 보내고 싶었던 할머니 댁에서 찾은 사람이 바로 최 할아버지다.

“할아버지 댁이 손이 귀한집이었어. 어머니가 얼굴도 보도 않고 좋다고 날을 잡았어” 그렇게 은하면 학산리에서 나고 자란 박 할머니는 자전거로 20분 정도 거리에 있는 결성면 성남리 중리마을로 시집을 오게 됐다. 중매로 만나 치르게 된 혼인이어서 초야를 치를 때가 돼서야 할머니는 할아버지 얼굴을 바로 보게 됐다. 할머니는 백세 가까운 나이에도 첫날밤을 치르던 그 날을 생생히 기억했다.

“그때가 1933년 10월 27일이야. 둘 다 나이가 열 몇 살밖에 안 먹었으니 뭘 알겠어. 나는 열여덟, 할아버지는 열여섯인데. 족두리도 쓰고, 원삼도 입고, 앞에는 술상도 있었어. 근데 할아버지가 미섭다고 옷도 못베끼는겨. 그래서 이렇게 긴 비녀를 내 손으로 내렸지 뭐야” 할머니는 옆에 앉아계신 할아버지를 보며 그때가 다시 생각나는듯 수줍게 웃었다.

금슬 좋은 부부였지만, 할아버지의 일로 떨어져 지내야 하는 시간이 많았다. 최 할아버지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부면에 있는 광산에서 일했다. 일제시대였던 당시, 일본인 광주(鑛主)는 똑똑하고 착했던 할아버지를 눈여겨보곤 서울로 유학을 보냈다.


서울에서 할아버지는 3년동안 서울에서 채광과 측량, 화약기술을 배웠다. “사람이 괜찮았으니까 중요임무를 맡긴 거였지. 그때 배웠던 기술덕에 해방 후에도 전국 광산을 돌아다니면서 일했어” 서부면에서 시작해 강원도, 전라도 등 안 간 곳이 없다 할 정도로 할아버지는 전국을 다녔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따라 나설 수도 있었지만 집에 남아 살림을 책임졌다. “할아버지가 일하러 가면서 꼼짝말고 돌아올때까지 기다리라고 하고선 갔어. 내가 집에 남아서 살림도 하고 농사도 짓고 했지” 집안 살림을 책임지는 동안 시집살이도 온전히 할머니 몫이 됐다.

첫 번 시어머니는 참 좋은 분이었다고 할머니는 기억했다. “시어머니가 참 좋은 분이었어. 그런데 나 시집오고 3년만에 돌아가셨지. 어찌나 허망스럽던지. 그때 우리 어머니도 내 걱정을 많이 했어. 새 시어머니가 오면 내가 고생을 많이 할까봐서. 우리 친정 어머니도 어렸을 때 외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계모 밑에서 자랐거든. 어머니가 8살 됐을 때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계모가 왔는데, 하루는 어머니랑 외삼촌을 방

이 아니라 광에서 재우게 한겨. 광에 배가 많이 있었는데 그거 지키라고 어린 남매를. 그런데 그날 광에 도둑이 들었지 뭐야. 그런데 남매가 요로고 웅크리고 자고 있응께, 도둑이 ‘너네 불쌍해서 도둑질도 못하겠다’면서 그냥 가버렸대. 그 다음날이 되니 다른 집 광에서 배가 없어졌다고 하대” 첫 번 시어머니가 돌

아가시고 나서 시아버지는 새 장가를 드셨다. 새 시어머니는 박 할머니와 4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네 살밖에 차이가 안나는데 ‘시어머니’소리가 나와? 그래서 입을 요로고 다물고 뭐라 부르지도 못하고 있으니께, 시어머니가 ‘네가 소냐’면서 ‘시어머니’라고 부르라고 혼냈지. 아휴” 할머니는 매운 시집살이가 아직도 가슴에 맺혀있다고 말했다. “그때 맬마다 시집살이 노래를 부르고 다녔어. 요놈의 시집살이 언제까지 하고 죽나하는 노래가 있거든”

그래도 시부모님의 금슬은 좋아 집안에는 금줄이 떨어질 날이 없었다. “시어머니가 예뻤어. 꾸미기도 잘 꾸미시고 다녔고. 고렇게나 이쁘니께 시아버지가 좋아 죽지. 시부모님 사이에  자식이 생기고, 나도 애기 낳고 하니께 집에 금줄이 항상 걸려있는겨. 금줄이 걸려있으면 일제때도 그렇고 사람이 집안으로 못들어

오니께, 세무서 조사 안받으려고 달아놓은거 아니냐는 오해를 받기도 했어” 새 시어머니와 나이차도 얼마 안 날뿐더러, 시댁에 들어온 시기도 3년차밖에 나지 않다보니 시누이와 시동생들을 박 할머니가 젖먹여 키우기도 했다고. “따지기야 따지자면 시동생인데, 다들 간난쟁이니께, 당시엔 내가 다 젖먹여 키웠지.

다 나이차이가 별로 안나다보니까 삼대가 같이 초등학교에 다닌 적도 있어. 그때 우리 첫째가 1학년에 다닐땐데 학교에서 할아버지라고 부르지 말랬다고 혼나기도 하고 그랬다더라고” 은하에서 나고 자라 결성에서 한 평생을 산 박 할머니는 한국전쟁도 이 곳에서 겪었다. 삼십 중반의 나이,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나선 피난길을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그때 자식들 데리고 피난을 다녔어. 은하로 천북으로 옮겨다녔지. 멀리 간 건 아니지. 그대 공산당 처들어온다고 싸게싸게 도망가야 한다고 해서 이리저리 다닌겨. 그때는 바닷물이 들어왔던 때였는데 천북으로 건너가려는데 애들이 많으니께 빨리 갈 수가 있어야지. 앞에 가는

거실에 걸린 가족 사진을 보며 흐뭇해 하는 박월규 할머니.

아저씨한테 ‘아이고 애 좀 하나 받아줘유’해가며 피난을 댕겼어. 그런데 피난 가봤더니 여기나 거기나 똑같더라구” 비록 짧은 시간의 피난이었지만 결성으로 돌아와 본 전쟁의 참상은 잔혹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에도 여그서 사람들이 많이 죽어 나갔어. 인천상륙작전 후에 대한청년당이 공산당을 몰아냈는데, 전

쟁 끝물에 공산당이 물러가면서 그 잔당들이 이쪽으로 온겨. 후퇴해가면서 여기서 많이 죽이고 갔지. 한 50명쯤 그때 죽었을겨” 좌우익의 대립으로 인한 피비린내도 끊이지 않았다. “지금 결성보건소 자리 근처가 ‘아홉골’이라고 불렸는데, 거기서도 한 100명 넘게 죽었지 아마. 전쟁 끝물에도 좌익, 우익 하매 복수하

고 또 복수하고 하면서 계속 그렇게 서로 죽이고 죽여서 그렇게 된겨” 일제시대부터 한국전쟁을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100년이라는 긴 세월을 살았지만 박 할머니는 “어떻게 시간이 가는 지 모르고 세월이 다 갔다”고 말한다. 이제 자식들도 80이 넘은 머리 희끗한 노인이 되었고, 손주도 나이 50을 넘어섰다. 그

동안 먼저 가슴에 묻은 자식도 있다. “8남매 중에 자식 둘이 먼저 갔어. 그게 항상 마음에 한으로 남아. 막내 아들하고 막내 딸이 먼저 갔지. 둘째 아들은 머리가 이제는 하얗게 됐지 뭐야. 아들이 너무 늙어버린 것 같아서 그 하얗게 샌 머리를 볼때면 가슴이 아파” 지금 박 할머니와 최 할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큰아

들 최재권 씨도 벌써 81살의 노인이 됐다. 큰 아들은 점점 나이가 들어가며 건강에 더욱 신경쓰고 있다고 한다. “불효 저지르면 안되니까, 어머니 아버지 다 살아계신데 먼저 가면 안 된다는 생각에 더 건강관리에 신경 써요” 큰 며느리 이연순(79) 씨가 대신 말했다. 결성면 성남리에서 중리 총각, 신리 처녀로 초등학교

를 같이 나온 부부는 큰 아들(박 할머니에게는 큰 손자) 최찬호(51) 씨와 함께 시어머니와 시아버지를 모시고 살고 있다. 처음 시집와 시부모님과 16년을 함께 살고, 30년을 분가해 살다 10년 전부터 같이 모시고 살고 있다. 내년이면 80인 나이에 큰 며느리는 하루 삼시 세끼 꼬박 항상 새 밥을 지어 올린다. 며느리 이

씨는 “하루 최소 2~3번은 찌개와 국을 새로 끓여 올리고 있다”며 “별다르게 효도할 건 없지만 이 거 한가지는 꼭 해드리려 한다”고 말했다. 저녁식사 때가 되면 큰 상에 삼대가 둘러앉는다. 박 할머니와 최 할아버지, 큰아들과 큰 며느리 부부, 그리고 큰 손주가 모여 앉아 그날의 이야기를 하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큰 손주인 최찬호 씨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건강히 살아계시는 아버지도 건강관리를 하시며 누구보다 건강하고 활발하게 지내고 계신다”며 “3대가 서로에게 맞춰가며 재밌게 살고 있다”고 말했다. 오는 22일이면 박 할머니의 백수잔치가 열린다. 5남 1녀의 자식들(6남 2녀), 10남 9녀의 손주들, 11남 12녀의 증손주들,  거실 한 가득 채운 그리운 얼굴들을 볼 날이 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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