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에서 만나는 사람들 대부분이 요즘엔 TV 뉴스를 보지 않는다고 한다. 잠시만 꾹 참고 보다가도 화가 치밀기만 하고, 자신의 무력감만 실감하게 된다는 것이다. 필자 또한 매한가지다. 뉴스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TV 드라마 등도 마찬가지다. 서로 자기 자신만 잘 났다고 큰소리치는 세상이다.
여기저기서 말로는 소통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요즘처럼 꽉 막힌 불통의 시대는 없었다고 생각된다. 대형이 아닌 소형TV 방송사에서 근래에 드물게 인기를 끈 ‘미생’ 드라마가 종영이 되었다. 그런데 이 드라마가 종영 후에도 사회적인 파장을 제법 크게 일으키고 있다.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현실감이 넘친다는 평가와 함께 우리 사회와 너무 닮았다는 점,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인간성의 회복 노력 때문일 것이다.
서점에 가보면 가장 중심의 좌판에는 학생들의 참고서와 비문학 서적들이 온몸을 드러내어 자리 잡고 있다. ‘부자 되기’, ‘쉽게 성적 올리기’, ‘나를 더 부각키기’ 등의 관련 서적들이다. 그 책들 속에서 우리들은 ‘너’나 ‘그’를 찾을 수가 없다. 오로지 나를 위한 것들 뿐이다. 문학이나 철학은 나만의 요소로 구성할 수 없는 장르이다.
반드시 ‘나와 너’, 또는 ‘나와 너, 그’들의 요소가 결합되어져 구도를 이루고, 그 구도에 따라 내용을 풀어내기 때문이다. 바로 우리는 그들 서로의 끈끈한 관계 속에서 ‘나’만이 아닌, ‘너’와 ‘그’의 면면을 헤아리게 된다. 그 가운데 나뿐만이 아니라 너나 그의 심중을 헤아리는 인성이 성립될 수 있다.
우리는 그 인성을 바탕으로 타인과 소통할 수 있으며, 타인을 배려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고, 그렇게 살아온 사람에게 아름다운 인성을 가지라 한다고 하여 가져질 일이 아니며, 소통과 배려가 저절로 이루어질 일이 아니다.
만일 해당항공사의 부사장 정도 되는 사람이 봉지 째 견과류를 내놓는 승객에게, ‘어머, 고마워요! 저야 아무래도 좋지만, 다른 분에게 드릴 때에는 그릇에 담아 드리면 더 좋을 것 같은데요’ 라고 했다면 어떨까? 그 승객은 존경심과 함께 평생의 교훈으로 새겨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부사장은 남의 입장을 생각해보고, 남의 입장에서 행동하는 배려를 공부할 틈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 것들은 대한민국의 상류층 덕목에 없으니까. 이제라도 문학과 철학이 사랑받는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 본래 인간이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어울림의 존재가 아니던가! 나를 알기 위해서는 너와 그를 알아야 하고, 나의 존재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너와 그의 존재 또한 인정해야 한다. ‘너’와 ‘그’라는 존재가 아름답게 보일 때, ‘나’라는 존재도 아름다워질 수 있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