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산 자락 천혜의 환경 지키는 장수촌 마사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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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산 자락 천혜의 환경 지키는 장수촌 마사마을
  • 장윤수 기자
  • 승인 2016.07.07 15: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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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일구는 색깔 있는 농촌마을사람들<18>
농촌마을의 위기 극복한 희망스토리를 만나다 - 금마면 월암리 마사마을
마을 진입로에서 바라본 풍경과 봉수산

금마면 최동단 위치… 홍성 금마면과 예산 광시면 경계 손꼽히는 고령마을 발맞춘 마을 만들기 사업 적극 전개 매화낙지형 명당·후백제 부흥운동 봉수산성 등 유서 깊어 마을 운영위원들 함께 모여 머리 맞대고 발전 방향 모색

◇천혜의 환경 갖춘 장수촌 마사마을
금마면 최동단에 위치해 홍성군 금마면과 예산군 광시면의 경계에 있는 월암리 마사마을은 뒷산인 봉수산을 중심으로 천혜의 자연 환경을 자랑하는 마을이다. 주민들은 아름다운 자연 환경을 보호하고 이를 후대에 물려주기 위한 꾸준한 정화 활동과 마을 관리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특히 진입로부터 뒷산까지 오르막으로 돼 있는 마을 경관은 다른 마을과 차별화되는 마사마을의 특징이기도 하다.

또한 마사마을은 관내에서도 손꼽히는 장수마을이기도 하다. 점차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추세에 맞춰 마사마을 박원기 이장은 이러한 특성을 살린 마을 만들기 사업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연세가 많은 어르신들을 위해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등 시스템을 갖춰 나가고, 버스정류장 등 주민이 자주 사용하는 시설 정비에도 나서 누구나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마을을 만들어나간다는 계획이다.

또한 마사마을은 올해 마을 회의 및 각종 행사를 진행할 수 있는 회의실을 착공할 계획으로, 회관과 함께 주민들의 휴식 공간이자 소통의 장으로 만들어나갈 계획이다. 이밖에도 봉수산으로 이어지는 산책로 조성 등 누구나 찾아오고 싶은 마을을 만들어나가는데 앞장선다는 계획으로, 금마의 자랑이자 홍성의 자랑이 되는 마을을 만들어나갈 계획이다.
 

회의 후 주민들이 간식을 나누는 모습.

◇마을 역사 및 개관
월암리 마사마을은 백제때 금주군이었고 신라의 임성군에 속했다가 고려 때는 홍주에 속한 지역이었다. 조선 초엽엔 홍주군의 일부였으며, 조선시대 말엽에는 홍주군 평면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월굴리, 신매리, 마사리, 봉암리, 및 천동 일부를 병합해 월암리라 하고 홍성군 금마면에 편입됐다. 월암리는 월굴과 봉암의 이름을 따서 만든 것이다. 그 후 일제강점기 말엽에 봉암과 마사로 분구됐는데, 한국전쟁 이후 잠시 합구됐다가 1960년대에 와서 다시 분리돼 마사마을은 월암 2리가 됐다.

마을회관.

◇매화낙지형의 명당이 있는 마을
마사마을은 예로부터 매화낙지형의 명당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풍수지리에서 매화낙지형은 매화가 땅에 떨어져 향기를 퍼뜨리듯이 자손이 번창하는 명당을 의미한다. 그래서인지 마사는 해주오씨 박웅이 낙향해 은거한 이래 자손이 번창했고 여전히 해주오씨들이 세거하고 있다.

마사마을은 해주 오씨와 안동 장시가 모여 살았던 마을이다. 해주 오씨 박웅은 세조연간에 무과에 장원급제하고 27세의 나이로 병조판서에 오른 남이 장군의 사위로 장인인 남이 장군이 1468년(예종즉위) 유자광의 모함으로 처형당하자 낙향해 금마면 봉수산 아래에 은거했다고 전해진다.

즉 오박웅이 금마면의 봉수산 아래로 낙향한 시점은 남이 장군의 사후이므로 1468년 이후가 된다. 그 후로 해주 오씨들은 대대로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아왔다고 해 적어도 500여년을 이곳에서 살아온 것이다. 마사의 윗솔거지에 해주오씨 사당이 있으며 아랫솔거지에는 안동 장씨의 재실이 있다.

회관 앞 느티나무 쉼터.

◇후백제의 부흥운동 일어난 봉수산성
마사의 봉수산 정상에는 백제의 부흥운동 거점지로 알려져 있는 임존성이 남아 있다. 임존성은 봉수산에 위치하고 있어 봉수산성으로도 불리고 있다.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사비성을 함락당한 백제는 복신과 도침, 흐기상지를 중심으로 임존성에서 나당연합군에 맞서 최후까지 항쟁했다. 임존성은 사적 제90호로 지정돼 있으며 지정면적은 93만7686㎡에 달하고 둘레는 약 2450m이다. 현재 성문·수구문과 우물터·건물지 등이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구룡산 아홉고개
구룡산은 월굴마을 뒷산으로 이 산 등성이에는 예로부터 장수혈이 있어 천하에 이름을 떨칠만한 훌륭한 장군이 나온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와서 구룡산은 아홉 고개가 만들어지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했다. 구룡산에 장수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일본사람이 사람들을 동원해 구룡산 등성이를 아홉 토막 내 장수혈을 끊어 놓았다고 한다. 해방 이후 마을사람들은 나무를 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구룡산의 말뚝을 제거했으나 아직도 어디에 박혀있는지 모를 말뚝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한다.

일제강점기 당시 월암리 마사마을 사람들도 3·1운동에 참여했다. 1919년 4월 4일 마사마을 사람들은 철마산에 올라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당시 철마산은 홍성시내까지 시야가 확보됐기 때문에 일본군의 진압이 시작되기 전에 피할 수 있었다.

당시 홍성시장과 철마산에서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고 일본경찰에 체포된 마사 사람들은 오규영을 비롯해 이한여, 김순재, 박춘일, 장성집, 장선기, 박순필 등이다. 당시 이들은 일본 경찰에 체포돼 보안법위반자 수형인 명부에 기재되고 태형 90대를 맞은 사람들이다. 1984년 8월 15일 이들의 행적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철마산 공원에 기미독립운동기념비가 세워졌다.

◇질패기 주막과 대동계
마사의 질패기는 봉암과 마사의 사이에 위치한 지역으로 예로부터 땅이 몹시 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주막은 질패기에서 월굴로 갈라지는 삼거리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1970년대까지 성행하던 소문난 주막이었다. 주막을 기억하는 마을 사람들은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주막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질패기주막은 예산에서 홍성장을 보기 위해 나바티고개를 넘어온 사람들과 홍성에서 광시장을 보기 우해 나바티고개를 넘어가는 사람들이 쉬어가던 곳이었다.

마사마을은 과거 마사에서 광시로 넘어가는 고개에 위치했던 서낭당에서 산신제를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는 마을공동제사를 지내지 않고 있으며 그 대신 대동계를 통해 마을의 화합과 친목을 도모하고 있다. 마사마을의 대동계는 해방과 동시에 창설됐지만 그 유래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사 마을의 일꾼들.

일제강점기 말엽인 1940년대 월암리의 청년들은 각자 분담해 만든 가마니를 팔아 공동기금을 마련하고 청년단이라는 조직을 창설했다. 당시 일본은 청년단의 명칭사용을 거부했고 마사마을의 청년들은 명칭을 변경해 월암리 친목계로 바꿨는데 이것이 지금의 마사마을 대동계의 시원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청년단은 마을 발전을 위한 일이라면 크고 작은 일을 가리지 않고 도맡아 처리했으며 혼례나 상례와 같은 행사가 있으면 청년회의 존재가 큰 힘이 됐다. 

이러한 밑바탕이 있었기에 대동계는 아직까지 잘 유지될 수 있었다. 대동계의 가입은 마을사람이면 누구나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하며 대동회는 연말에 이뤄진다. 마을계는 마을의 애경사에 상부상조하는 것을 목적으로 친목과 단합을 중시하고 있다. 대동회가 끝나면 마을사람들은 윷놀이를 하는 이 날은 마을에 한바탕 잔치가 벌어진다. 특히 최근에는 마을 운영위원회가 꾸준히 이어져 마을의 발전을 운영위원들이 함께 모색해 나가고 있다.

글=장윤수 기자/사진=김경미 기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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