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의 간절한 꿈 하늘로 전해진 ‘상하금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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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의 간절한 꿈 하늘로 전해진 ‘상하금마을’
  • 장윤수 기자
  • 승인 2016.08.05 09: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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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일구는 색깔 있는 농촌마을사람들<22>
농촌마을의 위기 극복한 희망스토리를 만나다 - 홍동면 금당리 상하금마을

사대문 형태 갖춘 토성으로 후백제 시대 곡창성
태조 이성계 왕 인주받기 위해 찾아와 기도한 곳
충신인 유해 기리는 관내 유일 충신문 자리 잡아
사방이 산으로 천혜 환경 속 농사짓는 장수 마을

▲ 홍동면 금당리 상하금마을 어르신들이 정자에 모여 담소를 나누며 환하게 웃고 있다.

◇태조 이성계가 제사 지냈던 마을
상하금마을은 초룡마을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따뜻하고 아늑한 마을이자 춘하추절 꽃이 피어 아름다운 마을인데 철새들이 찾아와 노래를 부르고 오곡이 풍년들면 어려운 이웃을 돕고 맛있는 떡을 해 조상님과 하느님께 천제를 지내는 당산제가 있었는데 그 뜻은 하느님께 감사하고 국태민안하고 세화년풍해 잘 살고 편안한 나라가 되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마을에서는 지금도 조상님께 시제를 올리고 있다.
금당리 상하금마을은 마을이 토성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토성은 사대문의 형태를 완벽히 갖추고 있어 마을 주민들은 오래 전부터 각 대문별로 제를 지내기도 했다. 상하금마을은 후백제 때 견훤왕이 봉수산성에 머물며 이곳을 곡식을 보관하는 곡창성으로 활용했다고 한다. 특히 성주가 바뀌며 계속 이어져왔는데 첫째 성주는 경주 김씨였고, 두 번째 성주는 해주 최씨, 세 번째 성주는 오경사, 네 번째 성주는 창원 유씨, 다섯째 성주는 절충장군이었다고 한다. 또한 고려 말엽 오경사 영의정이 낙향하면서 상하금 마을에서 거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태조 이성계는 명나라로부터 왕으로 인주를 받지 못해 금당리 상하금마을 당산으로 와 제를 지냈다. 당시 태조는 제사를 지내며 하느님께 자신이 왕이 되면 이 땅의 금을 누려드리겠다고 말했고 왕으로 승인을 받았으나 금을 누릴 기력이 없어 크게 탄식했다. 이에 무학대사는 아주 쉽게 누릴 방도가 있다 하며 왕께서 명산에 기도한 곳은 모두 쇠금자를 지명에 넣으면 수수만대 금을 누릴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이곳의 지명도 금동면 금동리가 됐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금당리 상하금마을에 이르게 됐다.

▲ 홍동면 금당리 상하금마을 전경.

◇마을 역사와 유해충신문
금당리는 고려 때 홍주에 속했고 백제와 신라 때는 미상이나 구전에 따르면 백제 때는 금주군, 신라 때는 해풍현에 속했다. 이조 초엽에 홍주군에 속했다가 말엽에는 홍주군 금동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때 상금리, 하금리, 호암리, 삼거리, 신대리, 백동, 가좌리, 별산리, 성당리, 한사리 각 일부를 병합해 상금리와 성당리의 이름을 따 금당리라 해 홍성군 홍동면에 편입됐으며 3개의 행정부락으로 분리돼 있다.
상하금 마을은 삼거리마을 동쪽으로 월운산 밑에 마을이 자리잡고 있는데, 상금과 하금 마을로 전해오고 있으며 월운산 중턱에 월운암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빈터만 남아 있다. 이조 때는 금동면의 면청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 마을 연역비와 유해충신문.

또한 마을에는 유해충신문이 자리를 잡고 있다. 유해충신문은 조선 중기 문신인 유해(兪瀣)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유해의 본관은 창원(昌原)이고, 자는 숙부(淑夫), 호는 송암(松菴)이다. 1542년(중종 37)에 출생해 율곡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가까이 지내다 1576년 생원이 됐다.
1592년(선조 25)에 종묘직장(宗廟直長)으로 재임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종묘와 영녕전(永寧殿)의 신주(神主)와 열성조(列聖朝)의 어보(御寶), 제향 홀기(笏記) 및 그림 등 귀중품을 거둬 의주(義州)로 이송했다. 

▲ 유해충신문.

이같은 공으로 임진왜란이 끝난 뒤 홍성공신에 추대됐고 1631년 89세로 세상을 떠나니 1867년(고종 4) 국가에서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를 추증하면서 정려를 세우도록 명했으며 시호는 충렬이다. 정려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의 목조와즙(木造瓦葺)건물로 내부에는 정려비와 명정 현판이 있다.
현재 정려각을 비롯한 충신문은 문중을 비롯해 충신 유해의 후손인 상하금마을 유철동 이장이 함께 관리하고 있다. 특히 정려비와 현판 보존을 위해 후손들이 직접 제초작업을 실시하는 등 관리에 적극 나서고 있다. 또 정려각 보존을 위해 사비를 들여 약품처리 등을 실시해왔으나 문중 형편의 어려움으로 관리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인정이 넘치는 마을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천혜의 환경을 자랑하고 있다. 축사가 거의 없어 환경 오염이 적고 깨끗한 환경에서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다. 특히 인삼과 표고버섯, 담배 등의 특화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마을은 대부분의 어르신이 8~90대로 장수촌을 이루고 있다. 마을은 둥글게 산으로 둘러싸인 형태로 마을회관과 정자가 마을의 중앙에 위치해 있다. 특히 한 마을 주민이 땅을 희사해 자리를 잡게 된 정자의 경우 마을 진입로에 위치해 오고 가는 이들과 인사를 건넬 수 있다. 태조왕이 기도를 하던 곳으로 많은 이들이 찾아와 기도를 하거나 제사를 지내는 등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 떡을 해 온 방문객들은 회관과 정자 인근 주민들과 함께 나누기도 한다. 또 마을주민 유영동 씨는 매일 한 자루씩 자신이 직접 농사를 지은 참외를 마을 정자에 가져오는 등 이웃과 어르신을 공경하는 삶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

▲ 홍동리 상하금마을회관.

유철동 이장은 46년째 이장 직을 맡고 있을 정도로 주민들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다. 특히 마을 주민들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등 마을을 위해 헌신해 귀감이 되고 있다.

글=장윤수 기자/사진=김경미 기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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