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와 송림으로 새 도약 꿈꾸는 신촌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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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송림으로 새 도약 꿈꾸는 신촌마을
  • 장윤수 기자
  • 승인 2016.08.18 16: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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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일구는 색깔 있는 농촌마을사람들 <24>
농촌마을의 위기 극복한 희망스토리를 만나다 - 서부면 판교리 신촌마을

청정지역·소나무 군락으로 내포문화숲길 품은 마을
어르신에 대한 공경 깊고 주민 다정하고 행복 넘쳐
지정·비지정 문화재 5점과 보호수 5그루 등 보유해
임득의 장군 묘역과 사당인 정충사 자리 잡은 마을

▲ 마을 주민들이 회관에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다.

◇역사와 전통의 청정 신촌마을

서부면 판교리 신촌마을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마을로 인심이 좋고 청정지역으로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이다. 청룡산 서쪽 산록에는 넓은 목초지가 있고, 거주민에 비해 농토와 대지 면적이 큰 편으로 축산농가가 있으나 주변은 청정지역으로 살기 좋은 마을이다. 특히 청룡산은 소나무 군락을 이루고 있어 내포문화숲길 등으로 지정이 돼 있고, 현재도 각종 임산물과 나무 관리에 적극적으로 나서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보존하고 있다. 마을에 위치한 둘레길인 내포문화숲길 송림 사이로 4.2km 가량 능선을 따라 걷다 보면 고산사로 연결되고, 아래로 내려가면 만해 생가지, 결성향교와 결성동헌까지 이어지게 된다.

▲ 신촌 마을회관.

신촌마을 내에는 임득의 장군의 영정이 봉안된 사당 정충사와 장군의 묘를 비롯한 지정 문화재 3점과 비지정 문화재 2점 등이 위치해 있다. 또 보호수로 지정된 나무도 다섯 그루가 있을 정도로 유서 깊은 마을이기도 하다.

신촌마을 주민들은 이러한 문화재와 자연환경을 바탕으로 홍성군의 자랑이자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명소로 마을을 조성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또 청정 환경을 바탕으로 누구나 살고 싶고, 살기 좋은 마을을 표방하며 연차적으로 내포문화권 개발 계획 등을 실시해나가고 있다.

1970년대 이전까지는 진입로와 농로개설이 미진해 오지 마을이었으나, 마을 북쪽인 중리(4개 마을)가 결성면에서 서부면으로 편입되면서 판교마을에서 마을을 관통해 중리로 통하는 직선 농어촌 도로가 개설됨에 따라 면 소재지와 가까워져 교통이 편리해졌다. 상권으로 갈산시장을 이용하고 있으며, 환경보호를 실천해 쾌적한 농촌마을 만들기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또한 어르신에 대한 공경심이 깊고 주민 간 다정하며 행복한 마을로도 유명하다.

◇마을 역사와 유래
서부면 판교리 신촌마을은 조선 초기 결성현에 속했다가 조선 말기에는 결성군 하서면의 판교리, 일제강점기에는 서부면 판교리로, 광복 후 4개의 행정마을이 정해질 때 신촌(새말)이라 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마을의 동쪽은 청룡산 정상으로 결성면 무량리와 경계가 되고, 북쪽은 중리 능동마을, 남쪽은 묵동과 판교마을, 서쪽은 양곡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서부면내에서 가장 오지 마을이었는데, 임득의 장군의 사당이 알려지면서 도로가 확대포장 돼 농가가 늘었고 지금의 신촌마을이 됐다. 

또한 신촌마을은 홍주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청난공신인 평성군 임득의 장군의 부친인 송파공 임식(林埴, 1539~1589)이 1588년경 평안북도 강계부사 임기를 마치고 귀향한 곳이다. 임식은 결성면 교항리 원교항 해변가 산자락에 ‘부해정’이란 정자를 짓고 학문 정진과 후진 양성에 진력하다 별세했다.

1612년 임득의 장군이 별세한 후 경기도 의정부 축성령에 많은 사패지를 받아 예장(국장규모)로 모셨다. 30년 후 부친의 연고지인 서부면 일대에서 명당자리를 찾아 1632년 서부면 판교리 청룡산 기슭에 많은 묘역의 토지를 하사받아 이장해 장군의 묘역이 만들어졌다. 당시 민가 2호가 있었는데 광복 후 넓은 농토와 초원이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농가가 점점 늘어 신촌이란 마을명이 생겼다고 추정된다.

▲ 마을 뒷산인 청룡산의 울창한 송림.

또한 임장군의 묘소 아래 건립된 정충사 근처 언덕 아래에는 항시 샘솟는 큰 우물이 있어 예로부터 임장군의 제사용 음용수로 사용하던 샘이 있었다고 한다. 이 근처를 ‘큰샘골’이라 부르고 있으며 지금도 용천수가 흐르고 있는 샘이 있다. 청룡산 정상 밑 7부 능선의 암벽 아래에는 염불암이란 절이 옛날부터 있었고, 절이 없어진 시기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으며 지금은 절터만이 있는데 마을에서는 유명한 절터 아래를 염불암이라 불러 마을의 소지명으로 전해지는 지역이 있다.

◇임득의 장군과 사당 정충사
마을의 동편 청룡산 주봉의 서편 산록 부분에 임득의 장군의 묘소와 영정을 모신 사당(충청남도 문화재 제340호 지정)이 건립돼 있다. 임득의 장군은 평택 임씨 송파공 임식의 아들로 가문이 대대로 충절을 지킨 명문가로 평성군파의 파조다.

▲ 정충사에 모셔진 임득의 장군 영정.

장군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선조대왕의 의주 파천시 임금님을 극진히 호위해 호성원종공신 1등에 봉해졌다. 1596년(선조 29년) 전란으로 민심이 흉흉할 때 인근 홍산엣서는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켜 임천, 정산, 청양, 대흥을 함락하고 홍주성을 포위해 형세가 매우 위급했다. 이때 임장군은 8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선두에서 홍가신 목사를 도와 난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워 청난공신 3등에 봉해졌다. 이 공으로 부모와 처자식에게도 전지 60결, 은자 5량 내구마 1필이 하사됐다. 이후 1607년에는 호성원종공신 1등에 봉해지고 충청도 수군우후를 거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종2품)를 역임했다. 임득의 장군 묘소는 본래 경기도 양주군 시둔면에 사패지를 하사받아 국장으로 장례를 모셨다가, 인조 때(1632년) 현재 판교리 청룡산하 명당에 이장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묘소 앞에는 400여 년의 수령을 가진 큰 소나무가 묘소를 지키고 있다. 소나무는 임득의 장군의 묘소를 이전할 때 심은 것으로 추정되며 보호수로 지정해 관리할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 임득의 장군의 묘. 비석은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충남문화재자료 340호로 지정된 정충사는 임득의 장군 묘소의 북서편 마을의 높은 위치에 건립됐으며, 임득의 장군의 영정(1604년 제작)이 봉안돼 있다. 매년 음력 9월 19일 장군의 업적과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군이 주관해 군 단위기관, 단체장과 유림 지역민과 후손들이 제향을 올리고 있다. 또한 사당 앞에는 지산 김복한이 지은 청란신도비가 세워져 있으며, 현재 영정과 문인석 2기, 추증교지 등 유물은 영구 보존을 위해 충청남도역사박물관에 기탁, 보관 중이다. 홍양청란비에는 임 장군을 비롯해 홍주성 5공신의 공적이 기록된 신도비가 당초 대교리 국도변(21호) 말 무덤 앞에 건립돼 있었으나, 국도의 확장 시설 등으로 현재는 백월산 중턱 청란사 앞에 이설돼 세워져 있다. 청란사에서는 매년 음력 2월 20일에 홍주향교 유림과 군내 기관단체장 등이 참여해 제향을 올리고 있다.

▲ 임득의 장군의 묘 앞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

글=장윤수 기자/사진=김경미 기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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