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훤과 왕건이 싸움을 벌였던 역사 깊은 금리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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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과 왕건이 싸움을 벌였던 역사 깊은 금리마을
  • 장나현 기자
  • 승인 2016.11.24 17: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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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일구는 색깔 있는 농촌마을사람들 <37>
농촌마을의 위기 극복한 희망스토리를 만나다 - 은하면 금리마을
▲ 금리마을 주민들이 마을회관에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다.

청동기 시대 유적 충남도지정 기념물 28호 고인돌
30년 넘게 이어온 딸기특산물 토경재배로 농사지어
서해안고속도로 관통, 홍성휴게소 마을에 속해있어
일제시대 금광 채굴에 주민들 10리를 줄서며 반대 

금리마을 개관 
은하면 금국리는 상하국 마을과 금리마을로 나뉜다. 금리마을은 마을이 아름답다고하여 비단 금(錦)자를 쓰는 것처럼 금리천이 쌍으로 마을을 감싸 안고 흐르고 부창산 등 야트막한 산자락에 감싸인 포근한 이미지의 마을이다. 마을은 2001년 완공된 서해안고속도로가 마을을 관통하면서 마을의 지형이 바뀌었다. 마을에서는 마을 위쪽으로 지나가는 고속도로의 홍성휴게소 건물 뒷부분이 보인다.
 
마을에는 예전부터 살기 좋아 이를 못마땅히 여긴 일본이 일제시대 쇠말봉이라고 부르는 곳에 기운을 쇠하기 위해 말뚝을 박았다고 하나 어디인지 몰라 제거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쇠말뚝에 가로막혀 과거 번성했던 마을이 더 이상 발전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마을의 구렁목이라고 부르는 야트막한 고개도 일제시대 길을 내면서 구렁이 목을 쳐냈다. 구렁목을 쳐낼때 고개에서 시뻘건 피가 흘렀다고 전해진다. 마을사람들은 구렁목이 적토흙이라 비가 올 때면 흙이 핏물처럼 씻겨내려가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 마을을 흐르는 금리천.
▲ 금리 마을을 관통하는 서해안고속도로의 홍성휴게소 뒷모습.

금리마을은 담양전씨 집성촌으로 현재 70%가 담양전씨이다. 담양전씨는 은하면 대율리와 장곡리, 구항면 내현리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담양전씨가 마을에 들어온지 400년 정도로 추정한다. 이외에도 온양방씨, 충주박씨, 연산서씨, 한양조씨 등이 살고 있다.

견훤과 왕건이 싸웠던 곳
전병준 노인회장은 마을의 역사를 줄줄이 꿰고 있다. 30년간 공직에 몸 담았던 전 노인회장은 홍성의 역사연구에 높은 관심을 보이며 마을의 역사를 설명했다. 금리마을은 후백제의 견훤과 고려 왕건이 싸움을 벌인 곳이다. 마을의 지명들은 군대와 연관이 깊다. 금리마을은 백제시대 결기(결성)군에 속했으며 전쟁의 최전방이었다. 장수골의 장수바위는 장군의 지휘소였으며 소쟁이라는 곳은 소대본부였다. 백이실에서 학산리로 넘어가는 고개마루인 솔정재는 쫄병들이 지키는 장소라는 의미로 결성과 홍성사이에 군인들이 지나들기에 지어진 명칭이다. 마을회관이 있는 마을의 중심지인 백이실은 무장한 백성이 지키는 곳이라는 뜻이다. 

청동기 시대 만들어진 지석묘는 장군이 단상처럼 올라가 벌판에 군인들을 세워놓고 설명하고 지휘했던 곳이라고 한다. 마을에는 가끔씩 화살촉이 출토된다. 지금도 찾아보면 돌화살촉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 전남진 이장이 풀섭을 헤치며 금광이 있었던 곳을 안내하고 있다.
▲ 금리마을의 폐금광. 입구가 막혔지만 금광은 150m정도 이어진다.

마을의 금광
금리마을에는 금광이 몇 군데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서 금을 캐려고 하자 마을사람들은 10리를 늘어지게 줄을 서며 반대했다고 전해진다. 주민들은 어린 시절 금광에 들어갔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150m정도 이어지는 금광에 새우젓 등을 보관하는 저온창고로 이용하거나 여러 가지로 이용할 수 있으면 유용한 곳이 될거라고 한다. 

전남진 이장의 안내로 금광을 찾아 나섰다. 전 이장도 금광에 간지 30년 만이라며 앞장섰다. 부창산 인근까지 차를 타고 가고 차가 들어갈 수 없는 시골길을 따라 약 300m를 걸어 들어갔다. 금광 앞에 다다르자 가시덤불과 덩굴이 무성해 앞으로 제대로 걸어가기 힘들었다. 덤불을 헤치고 금광 앞에 갔으나 아쉽게도 입구가 막혀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금광은 입구 맨 위쪽을 제외한 모든 곳이 막혀 있어 내부를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입구만 막혔을 뿐 내부는 긴 터널이 이어져 있다고 한다. 마을의 금광 외에도 금리천에서 사금작업을 하는 등 금리마을은 예부터 금이 풍부했던 지역으로 전해진다.

마을의 인물

▲ 금리마을 출향인 방기석 지비엠아이엔씨 대표.

금리마을 인물로 방기석 지비엠아이엔씨 대표가 있다. 방 대표는 유소년 시절을 금리마을에서 보내고 중학교 3학년 때 가족이 서울로 이사했다. 방 대표는 연세대 공과대학원 기후변화협약 전문가과정을 수료하고 서울대 환경대학원을 졸업했으며 (사)한국기상산업협회 협회장을 맡아 기상산업 발전에 지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 방 대표는 국내 환경에 맞춘 기상모티터링 시스템을 개발하고 고객맞춤형 기상예보사이트인 ‘153웨더(http://www.153weather.co.kr)’를 선보여 고객별 정확한 기상예보를 전하고 있다. 또한 그는 지난 9월 경주 대지진 등 계속되는 기상이변에 대비해 기상, 구조, 건축 등을 총망라해 집약적 재해재난협회를 구성해 재난에 대비하는 기관을 만들고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금리마을에는 온양방씨 선조인 방찬성으로 추정되는 효자정려문의 현판이 남아있다. 지석묘 인근에 있었던 정려문은 현재 현판만 남아 방 대표

과거 금리 고인돌 인근에 위치했던 온양방씨 효자정려문 현판만 남아 있다.

의 금리 큰집에 있다. 방 대표는 중요한 문화재가 사라짐을 안타갑게 여겨 가끔식 고향에 내려와 문화재복원을 논의하고 있다.

이 밖에도 금리마을의 인물로 새만금개발청장을 지낸 전병국 씨와 중앙해양안전심판원장을 지내고 있는 전기정 씨 등이 있다.

이장의 마을소개
우리마을은 43가구 85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으며 대부분의 주민들은 딸기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15가구가 딸기 작목반을 구성하고 있으며 딸기농사를 지은 지는 30년이 넘었네요. 요즘은 고설재배를 많이 하는데 금리마을은 아직 토경재배를 하고 있어 당도가 높고 맛이 아주 좋습니다. 딸기는 주로 서울의 강서공판장으로 출하하고 있으며 4,5월에 서울을 못 갈때는 홍성휴게소에서 14일정도 딸기를 판매하고 있습니다. 

금리마을은 다른 마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주민들 간 화합을 자랑합니다. 마을에 귀촌한 민현식 노인회 총무님은 팔도를 돌아다녀봐도 충청도만큼 서로를 위해주는 곳이 없다고 귀촌생활에 만족해합니다. 마을에서 상을 당하면 한명도 빠짐없이 온주민들이 삼일간 곁에 있으며 슬픔을 같이 합니다. 부녀회는 부녀회대로 노인회는 노인회대로 화합을 다져 마을 발전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또한 금리마을은 홍성군보건소에서 ‘생명사랑 행복마을’로 지정돼 매주 수요일 어르신 건강체조교실을 운영했는데 어르신들이 잘 따라주셨습니다. 저는 이장을 맡은 지 올해로 2년차로 정성껏 마을일을 돌봐 우리 금리마을이 앞으로 무궁히 발전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전남진 이장이 딸기를 금리마을 특산품인 딸기를 따고 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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