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가 즐비한 한다리, 단합심 넘치는 정광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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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가 즐비한 한다리, 단합심 넘치는 정광마을
  • 장윤수 기자
  • 승인 2016.12.22 16: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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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일구는 색깔 있는 농촌마을사람들<41>
농촌마을의 위기 극복한 희망스토리를 만나다 - 금마면 가산리 정광마을

21번 국도와 맞닿은 ‘시골 속 도시’ 마을로 유명해
마을 위한 이장 노력·마을 주민 협조 잘 하며 화합
365일 열린 마을회관에 모여 식사 나누고 이야기꽃
물 간절하던 천수답에서 예당저수지 물 쓰는 마을로

▲ 마을회관에 함께 모여 정을 나누는 정광마을 주민들.

21번 국도와 접한 정광마을

금마면 가산리 정광마을입구는 21번 국도에 접해있고 이 길은 홍성과 예산을 이어주는 4차선 도로다. 마을입구에는 각종 상업시설이 즐비해 있고 홍성에서 출발하는 시외버스의 중간 기착지로 버스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항상 머물곤 한다. 바로 인근 화양천을 건너는 ‘대교’가 건설돼 있어 이 지역을 ‘대교’ 또는 ‘한다리’라 부른다. 대교는 일제강점기였던 1934년에 2차선으로 만들어졌다. 원래부터 홍성과 예산을 잇는 큰길이기도 했으며 이 지점은 가산리와 대인리 등 아홉 동네 사람들이 모이는 중앙 지점으로 일대의 중심지가 되었다. 한때 장이 서기도 했고, 지서와 술도가집이 있을 정도였는데 해방 직후 큰 홍수가 나면서 모든 것이 쓸려나가는 피해를 입은 후 규모가 축소됐다.

▲ 정광마을전경.

예전보다는 덜하다고 해도 지금까지 ‘금마시’라고 할 만큼 한다리 동네는 시골 속 도시와도 같다. 인구가 많고 주유소, 자동차수리점, 식당 등 온갖 상업시설이 모여있다. 4차선 도로가 생긴 이후로는 구 다리를 없애고 그 자리에 4차선의 대교를 새롭게 건설했다.

단합과 화합 잘 되는 정광마을

상가가 밀집한 지역과 농촌이 상존하는 마을 특성상 상가 인근에는 상대적으로 젊은 인구가 많이 거주하고 있으며, 농사를 짓는 마을 안쪽으로는 어르신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다. 총 52가구 115명이 거주하는 정광마을은 무엇보다 화합과 단합이 잘 되는 것이 가장 큰 자랑거리다. 마을 주민들은 특히 김태성 이장이 동네일이라면 발 벗고 나선다며 칭찬했다. 마을 주민들 역시 마을일이 있을 때면 예로부터 협조를 잘 해왔고 모임도 원만하게 이뤄져왔다. 마을 주민 대부분은 벼농사를 짓고 있는데, 최근 떨어진 쌀값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자녀들은 홍성이나 객지에 나가 공직생활을 하거나 직장 근무를 하고 있는데, 이처럼 어려운 형편을 헤아려 마을에 수시로 들르며 각종 먹거리와 생필품을 전달 해 주고 있다.

▲ 365일 항상 문이 열려 있는 정광마을회관.

상가를 운영하는 주민들의 협조도 원만히 이뤄지고 있다. 특히 지산한의원의 경우 어르신들이 사용하는 마을회관에서 전기세 걱정으로 에어컨을 맘껏 틀지 못할까봐 직접 전기세를 지원하겠다고 나서는 한편, 마을회관 증·개축에도 힘을 보탰다. 마을회관의 경우 외부에 재래식 화장실이 자리해 있는데, 여름이면 모기가 들끓고 무릎이 아픈 어르신들의 경우 이용이 쉽지 않은 형편이었다. 이에 여러 마을 관계자들의 협조 속에 실내 화장실을 설치하고 회관 내부 커튼 시설을 설치하는 등 쾌적한 환경을 조성해 어르신들의 마을회관 이용에 도움이 되고 있다.

마을회관은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365일 항상 문이 열려 있으며, 주민들은 함께 모여 밥을 해 먹거나 이야기를 나눈다. 정광마을은 홍성에서 최초 여자 이장을 배출한 마을이기도 하다. 이경자 전 이장은 부녀회장과 마을 총무는 물론, 마을 이장까지 보며 마을의 대소사를 두루 살핀 경험으로 마을 일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있다.

▲ 정광마을을 알리는 이정표.

정광마을 개관과 역사

가산리는 홍북면과 금마면의 경계에 맞닿은 마을로, 금마면에서도 가장 북쪽으로 치우쳐 있다. 동쪽으로는 예산군, 서쪽으로는 송강리, 남쪽으로는 인산리, 북쪽으로는 홍북면 대인리에 접해 있다. 백제 때는 금주군에 속하고 신라 때는 임성군이었다가 고려 때 홍주에 속했다. 신라 말엽엔 신라의 쇠퇴로 후백제에 속해서 신라와 잦은 싸움이 벌어진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에는 홍주에 속했으며 조선 말엽엔 홍주군 평면 지역이었고, 일제강점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가야리·정광리·대교리 일부와 대감개면 대교리를 병합해 가산리라 하고 홍성군 금마면에 편입됐다. 정광리는 가산1리, 가야리는 가산2리로 편제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광마을의 역사는 적어도 후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존성의 서편에 자리 잡은 마을이어서 후백제군이 마지막까지 진을 치고 항전했던 역사가 전설 속에 남아 있다. ‘군감치’ 고개는 후백제군을 치기 위해 신라군이 잠복했던 자리라고도 알려져 있다. 군감치 부근은 ‘테미산’이라고도 불리는데 우리나라에서 ‘테미산’이란 지명을 가진 산에는 성이 없는 경우가 많다. 성에 대한 조사는 이뤄진 바 없으나 임존성과의 관련성, 군감치 고개 이야기 등으로 미뤄 군사적 성격에 대해서는 검토가 필요한 상황이다.

마을 동쪽에 있는 표고 114m의 산에서 북서쪽으로 흘러내린 능선의 남서향사면 하단부에는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고분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모두 경작지로 개간하고 지형도 심하게 변해 구체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없으나 주민의 전언에 의하면 십 수 년 전에 야산을 인삼밭으로 개간하는 과정에서 몇 기의 고분이 노출됐다고 한다. 대부분 구들장 크기의 석재를 사용해 구축했다고 하는데 묘실 내부에서 출토된 유물이 자기류였다는 점에 미뤄 고려시대 분묘로 추정되고 있다. 한편 오륙골 끝 인공수로 근처에는 판석을 이용해 방형으로 묘실을 만든 고분이 있었고 내부에서 토기가 보일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흔적을 확인하기 어렵다고 한다.

정광마을 성씨와 농경지

▲ 드넓게 펼쳐 있는 정광마을 농경지.

정광마을에서 전통이 가장 깊다고 알려진 성씨는 연안 명씨로 일설에 고려말부터 정광에서 살았다고 한다. 명씨가의 묘역은 오륙골 안쪽 고랑에 형성돼 있고 정광마을 뒤편에 입향조의 묘라고 알려진 묘 1기가 있다. 그후 의성김씨, 광산김씨, 김해김씨, 파평윤씨 등이 차례로 입향했다. 광산김씨는 이웃한 가야마을의 세거 성씨이기도 하다. 300여 년 전에 입향한 입향조의 어머니가 홍주이씨였고, 외가의 인연으로 이곳에 왔다고 하니 가산리 일대에 이미 홍주이씨의 터전이 마련돼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홍주이씨는 홍성의 토착성씨로 고려시대부터 위상이 대단했던 가문이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성씨를 조사했던 보고서에 의하면 가산리 정광에는 파평윤씨 윤관의 후예가 안거하고 있다고 하는데 실제 파평윤씨는 많지 않았다고 한다.

정광마을 농경지는 오륙골과 번개들 등으로 매우 넓은 편이지만 불과 50여 년 전만해도 물이 없어 농사가 어려운 황무지가 많았다. 그야말로 ‘천수답’이었고, 비가 내리지 않으면 농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는데, 사람들은 화양천에 보를 쌓고 물 품어 쓰기가 가능한 보 근처에서 농사를 지었다. ‘일곱마지기보’, ‘아홉마지기보’ 등으로 불릴 만큼 하나의 보에 막아둔 물로 지을 수 있는 농사는 크지 않았지만, 그나마 물을 쓰기 쉬운 땅에는 벼가 잘 자랐다. 물가에서 멀어질수록 수확량이 적었고 한마지기에서 한묏구리가 나온다는 ‘묏구리 타작’이 성했다. ‘묏구리’는 가마니보다 훨씬 작은 것인데, 큰 통에 물을 담아 사람이 직접 매고 와 자기 논에 물을 대는 일은 힘들었지만 여자들까지 동원됐다. 1960년대 골짜기 중간쯤에는 샘을 파 쓸 수 있었고 물이 전혀 없는 동네를 위해 면에서는 양수기를 임대해줬다. 1980년대에 이르러 예당저수지 물을 끌어다 쓰기 시작하면서 물 걱정을 덜고 경지정리도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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