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정 넘치고 주민 단합 으뜸인 장수 인흥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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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정 넘치고 주민 단합 으뜸인 장수 인흥마을
  • 장윤수 기자
  • 승인 2017.01.05 11: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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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일구는 색깔 있는 농촌마을사람들<43>
농촌마을의 위기 극복한 희망스토리를 만나다 - 금마면 인산리 인흥마을
▲ 인흥마을 주민들이 회관에 모여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산이 마을 둘러싼 형태로 ‘천호마을’이라 불리기도 해
윷놀이·칠석 행사·경로잔치·선진지 견학 등 단합 으뜸
마을주민 힘 합쳐 마을 뒷산인 퇴뫼산 둘레길 조성해
쥐불놀이의 추억 간직하고 베틀마을로 지정받은 마을

 

▲ 인흥마을 입구의 표지석과 소나무.

■산으로 둘러싸인 장수 인흥마을
금마면 인산리 인흥마을은 산숫말, 안산말, 골말, 양지말을 통틀어 인흥마을이라고 한다. 인흥마을은 산이 마을을 빙 둘러 감싸고 있는 형세를 갖추고 있으며, 위에서 내려다 봤을 때 원형의 모양을 갖추고 있다. 마을회관이 있는 곳을 포함한 안산말과 안산말을 오른편에 뒀을 때, 산숫말과 골말과 양지말이 차례로 왼편으로 나란히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다. 산이 마을을 빙 둘러 감싸고 있어 ‘천호마을’로 불리기도 했다. 산이 마을을 빙 두르고 있어서 하늘이 마을을 보호하고 재난도 마을로 들어올 수 없으며 전염병도 산에 막혀 들어올 수 없는 천호마을이라는 것이다. 또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 때문에 서낭당이나 수구매기도 없는 것이 특징이다.

▲ 금마면 인산리 인흥마을의 일꾼들

인흥마을은 인산리 마을로 백제시대에는 금주군에 속했고 신라시대에는 임성군에 속했다. 고려시대에는 홍주에, 조선 초엽에는 홍주군에 속한 지역이었으며 조선 말엽에는 홍주군 평면 지역이었다. 일제강점기였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인흥리, 석산리, 양지리, 강월리 및 용당리 일부를 병합하는 과정에서 인흥과 석산의 이름을 따 인산리라 해 홍성군 금마면에 편입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불리고 있는 인흥이라는 지명은 1960년에 붙여졌다.

인흥마을에 가장 먼저 들어온 성씨는 여흥 민씨로, 낙향해 마을에 들어온 시기는 1500년대로 확인된다. 여흥 민씨는 회관과 산수골 사이 골말에 터를 잡았고 비슷한 시기 안동 장씨가 회관 위쪽과 양지말에 자리를 잡아 세거하기 시작했다. 가장 늦게 세거한 성씨는 한양 조씨로 산숫말에 모여 살았다고 한다. 인흥마을은 다른 농촌마을보다 훨씬 노령화가 급속히 진행된 마을이다. 40세 이하의 연령 마을 주민은 한 명도 없을 정도며, 현재 인흥마을 주민들은 70대와 80대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장수 마을이다. 지난해까지는 100세 이상 어르신도 두 분이 계셨으나 현재는 돌아가셨다.

장수마을답게 인흥마을에서는 매일 점심과 저녁 두 끼를 어르신들에게 대접하고 있다. 혼자 사시는 어르신들은 회관에 모여 담소를 나누고 식사를 함께 하며 온정을 나누고 있다. 또한 외지에 나가 있는 자손들이 수시로 마을에 들러 부식을 사다주는 한편, 마을 내에서 과수원을 운영하는 주민들의 지원으로 회관에서는 겨우내 먹을 수 있는 배와 사과 등 과일이 풍족하게 마련돼 있다.

▲ 인흥마을회관 앞에 자리한 정자.

■화합 잘 되고 인심좋은 인흥마을
인흥마을은 다른 마을보다 주민들이 서로 돈독하고 화목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마을이 윗마을이나 아랫마을로 갈라지지 않고 화합하며 격년제로 보름에는 윷놀이를 실시하고, 칠석에는 별도의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인흥마을의 행사에는 고향을 떠난 출향인들이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등 항상 도움을 주고 있다. 또한 인흥마을 조준희 이장과 친분이 있는 한의원과 자매결연을 맺어 수시로 건강진료를 실시하는 등 어르신들을 위한 복지에도 힘쓰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밖에도 노인회를 비롯한 마을에서는 경로잔치, 선진지 견학 등도 해마다 실시해 귀감이 되고 있다.

인흥마을의 경우 화합이 잘 돼 마을 내 교회와 절까지 모두 공동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지리적으로도 온화한 특성 때문인지 좋은 사람들이 많고, 객지에 나갔던 주민들이 고향에 돌아와 살고 있기도 하다. 고향을 떠났다가 돌아온 주민들은, 어르신들의 인심이 좋고 마을 일에 서로 적극 협력하는 등 불편한 사항이 하나도 없는 것이 마을의 가장 큰 장점이자 자랑이라고 입을 모은다.

또한 인흥마을은 최근 부지를 마련해, 주민들이 집단으로 집을 짓고 함께 살아가기 위한 기반 마련에도 나서고 있다. 마을 이장을 비롯한 임원들은 희망마을이나 마을 만들기 사업에 대한 구상에도 나서고 있으나, 고령화로 인해 어려움이 따르고 있는 실정이다.

▲ 인흥마을회관 전경.

■퇴뫼산 둘레길·가물지 않는 인흥마을
인흥마을 뒷산인 퇴뫼산은 백제시대 적을 막기 위해 산을 쌓았고, 성터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다. 또 퇴뫼산에는 서낭당이 있었다고 하나,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위치로 결국 없어져 현재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마을 주민들은 퇴뫼산에 자발적으로 둘레길을 조성했다. 8km 구간의 둘레길은 마을 전경을 비롯해 산 너머 예산 지역까지 둘러볼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또 마을 인근 봉수산에는 관 주도의 둘레길이 마련돼 있어 임존산성을 비롯해 예당저수지와 내포신도시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다른 마을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가물었던 기억으로 남아있는 기묘년에도 인흥마을만은 가물지 않았다는 사실은 매우 신기한 일이었다. 인흥마을은 예전부터 물이 좋아 가물지 않는 마을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마을이 모두 가물어 기아에 허덕일 때도 인흥마을만은 가물지 않아 물을 길어 농사를 지었고, 물이 얼마나 좋던지 쌀도 맛있기로 인근에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현재는 마을에 저수지가 있는데, 이 저수지는 새마을운동 시기 만들어진 것으로, 예당저수지의 수로로서 마을 농사를 짓는 농업용수로 요긴하게 사용되고 있다.

■천석꾼 윤부자와 인흥마을의 풍습
인흥마을에서는 천석꾼 윤부자라고 불렸던 집이 두 집이나 있었다. 이 두 집은 모두 양지말에 거주했고, 두 집 모두 청양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그 중 인흥마을에서 손꼽을 수 있었던 단연 부자는 ‘윤식’이라는 사람이었다. 윤식은 여운형과 명치대 동창관계로 당시 인흥마을에서 유일하게 대학을 졸업한 사람으로도 관심을 끌었던 사람이었다. 또 그가 인흥마을에 일본인들이 들어왔을 때 유창하게 일본말로 대화를 주고 받는 것을 기억하는 동네 주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천석꾼 부자였던 윤식은 이승만정권 시기의 토지개혁 때 갖고 있던 논을 전부 몰수당했고 빈털터리가 돼 마을을 떠났다고 한다. 당시 그는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서울로 빈손으로 떠났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현재 그의 묘가 마을에 위치해 있어 명절마다 동네 사람들은 윤식의 자손들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이밖에도 50여 년 전, 인흥마을에서 가장 큰 민속놀이 중 하나는 쥐불놀이였다. 매년 보름날 봉서리마을 젊은이들과 평리마을 젊은이들이 논 한가운데 모여 편을 나눠 마을 대항으로 쥐불놀이를 했다. 지금은 사라져 아쉬운 민속놀이가 됐으나, 주민들에게는 쥐불놀이에 대한 생생한 추억들이 남아 있다. 또 인흥마을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벼농사를 짓고 있고 일부 농가에서 과수원을 운영하고 있다. 이러한 농사일을 제외한 부업으로는 대마질과 삼베짜기가 행해졌는데, 홍성군에서 ‘베틀마을’로 지정을 받아 지원을 받기도 했다. 삼베작업은 동네 할머니들이 중심이 돼 진행했으며, 삼베작목반이라는 조직을 구성해 3년간 삼베작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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