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체육공원 조성으로 주목받는 광천 신랑 2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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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체육공원 조성으로 주목받는 광천 신랑 2동
  • 장윤수 기자
  • 승인 2017.01.12 13: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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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일구는 색깔 있는 농촌마을사람들<44>
농촌마을의 위기 극복한 희망스토리를 만나다 - 광천읍 광천리 신랑 2동

공동묘지자리 생활체육공원 조성… 전국체전 정구 진행
마을 발전 앞장 선 최동호 선생과 송기태 공 비석 세워
일제강점기 병막→한국전쟁 훈련장소→성중학교 이어져
척사대회·대동계 등 마을 주민 단합심 높은 것 큰 자랑

▲ 지난 6일 신랑 2동 주민들이 김석환 군수와의 대화 후 기념촬영을 하며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생활체육공원 조성된 신랑 2동
광천리에서 가장 많은 주민이 살고 있는 마을은 신랑 2동이다. 북쪽으로는 매봉산, 남쪽으로는 오서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으며 마을 가운데로 국도가 지나고 있다. 마을 윗부분에는 과거 공동묘지가 자리해 있었으나 현재는 생활체육공원이 조성돼 마을 주민들이 손쉽게 게이트볼과 국궁, 산책을 할 수 있게 됐다. 특히 지난해에는 정구장이 신설되면서 전국체육대회 경기장으로 활용된 바 있기도 하다. 주민들은 앞으로 정구장을 적극 홍보하고 활용해 신랑 2동 및 광천읍민의 생활체육 공간을 넘어서,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는 체육의 장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마을의 지형이 새가 날아가는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새날굴’이라는 지명을 갖고 있었으나, 결국 그 새가 날아가 버리는 바람에 확 트인 넓은 부지를 가지고 있는 마을이 신랑 2동이라는 설명이다. 한편 신랑 2동은 동쪽으로는 소암리, 서쪽으로는 신랑 1동, 남쪽으로는 오서산, 북쪽으로는 매현리와 접하고 있는 마을이다.

현재 마을 앞 도로를 경계로 재래시장 쪽에 위치한 생활체육공원 옆은 신랑 2동의 7반이다. 7반은 한국전쟁 이후 피난민들이 거주했던 해방촌이었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피난민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살 수 있도록 판자집을 나란히 지어 거처할 공간을 조성해 줬다. 해방촌이 생긴지 60여 년이 돼 많은 주민들이 마을을 떠났으며 집이 부서지기도 했다. 신랑 2동은 해방촌이 있는 마을이었기 때문에 경제적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가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정신력으로 근면성실하게 살아온 덕분에 현재는 어느 마을 못지않게 훌륭한 마을이 됐다고 전해진다.

   
▲ 신랑 2동 마을은 도로를 중심으로 형성돼 있다.
   
▲ 신랑 2동 마을회관 전경.

■마을 발전 공로 최동호 선생·송기태 공
살기좋은 신랑 2동을 만들기 위해 애쓴 인물은 많지만, 최동호 선생과 송기태 공은 마을 주민들이 모두 후세에까지 기리자는 취지로 마을에 두 개의 공덕비를 만들었다. 노인회관 앞에 세워진 공덕비는 최동호 선생의 덕을 기리는 비석이며, 마을회관 앞에 세워진 불망비는 송기태 공을 기리자는 취지에서 건립한 비석이다.

최동호 선생은 신랑 2동의 초대 노인회장으로 오랫동안 마을 주민들의 염원이자 숙원사업이었던 복지회관을 건립하는데 앞장서서 대지를 기증했다. 덕분에 신랑 2동 주민드은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오랫동안 기리기 위해 마을 한가운데 위치한 노인회관 앞에 공덕비를 건립하게 됐다고 한다. 최동호 선생은 마을 노인회장을 오랫동안 도맡아 했을 뿐 아니라 결성향교 전교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주민들은 최동호 씨를 하나 같이 ‘선생’으로 칭해 높여 부르며 존경을 했던 마을 어른이었다고 한다.

한편 송기태 공은 황해도 금천 출신으로 한국전쟁 당시 부부가 같이 신랑 2동으로 들어와 터를 잡고 살면서 마을 주민들을 위해 살아 생전에 모은 전 재산 500평의 땅을 기증한 인물이다. 그가 모은 재산은 그가 평생을 고무신장사를 하면서 모은 재산이었기 때문에 마을 주민들에게는 더욱 의미 있고 값진 것이었는데, 이 부부에게는 자손이 없었기 때문에 마을 주민들은 고마운 마음을 기리며 매년 한식날 공덕비에 술잔을 올리는 것으로 고마움을 표현하고 있다.

신랑 2동은 마을을 위해 재산을 기부하는 등 마을 발전을 위해 애쓰는 주민들이 많다고 한다. 이러한 원동력은 마을 주민 간 끈끈한 결속력과 화합 때문이라고 주민들은 입을 모은다.

▲ 신랑 2동에 조성된 생활체육공원 중 정구장의 모습.

■역사를 간직한 담배창고
마을입구에 위치한 KT&G 창고부지는 근현대시기를 모두 겪어낸 역사깊은 장소다. 이 창고부지에는 일제강점기 ‘병막’이라 불리던 전염병 환자들을 집단으로 수용했던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당지 괴질 등 공기를 통해 전염될 수 있는 환자들이 수용돼 치료를 받았던 곳으로, 시내 중심가보다는 상대적으로 한적했던 신랑 2동에 건립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한국전쟁시기를 맞아 병막이었던 건물은 호국군인들의 훈련장소로 사용됐다. 당시 홍성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전쟁에 나가기 위한 호국 군인들은 모두 이곳에 집결해 군사훈련을 받았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이 부지에 ‘성중학교’라는 학교가 건립됐으며, 고등공민학교로서 당시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으나 중학교 인가를 받지 못해 고등학교 진학시험을 치룰 수 없었기 때문에 1970년대 폐교됐다. 신랑 2동에 가장 많은 인구가 살았던 전성기는 마을에 성중학교가 있었던 시기와 맞물린다고 한다. 당시 마을에 학교가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신랑 2동의 세대수는 400세대 가까이 될 정도로 번성했다고 한다.

■척사대회·대동계 통한 주민 친목 도모
신랑 2동 주민들의 자랑거리는 마을 주민 간 끈끈한 단합심이라고 한다. 매년 음력 정월대보름에 열리는 척사대회 덕분인데, 청년회에서 주관해 개최되는 척사대회는 그저 하루 윷놀이를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주민들이 풍악놀이를 하며 흥을 돋우고 다같이 마을회관에 모여 점심을 먹는다. 청년회에서는 마을 어른들을 위해 윷놀이대회 상품으로 각종 상품을 준비해 재미를 더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대동계를 매년 6월과 12월에 개최해 마을 전 주민들이 모여 번영과 화합을 위해 의견을 조율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 또 일년에 한 차례 어버이날을 전후해 주기적으로 청년회에서 노인회원들에게 효도관광을 주선하고 있기도 하다. 마을에서는 어른들을 위해 사비를 들여 노인회원 40여 명의 영정사진을 찍어주는 주민도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신랑 2동 마을의 자랑거리는 주민들끼리 단합이 잘 돼 작은 일에도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고, 주민들끼리 사이가 좋다는 점이다. 노인회원들은 청년회원들 덕분에 마을 화합이 이룩됐다고 하며, 청년회원들은 노인회원들이 중심을 잡고 버텨줬기 때문에 마을 화합이 이룩되고 있다고 서로 공을 돌렸다.

해방촌이 있어 가난한 마을로 유명했던 신랑 2동은 현재는 사람이 살기 매우 좋은 동네가 됐다. 마을 한가운데 위치한 마을회관과 노인회관 앞 약 600㎡(200여 평)의 부지는 마을 주민의 공동재산이다. 또 마을창고에서는 매년 창고 임대료로 150만원의 주기적인 수입이 발생해 마을 대소사를 위한 기금으로 사용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다른 마을은 노인회관과 마을회관이 한 건물로 통합돼 있지만 신랑 2동은 마을 주민이 주민들을 위해 희사한 기금과 부지를 이용해 할아버지들만의 전용 쉼터는 노인회관을 사용하고 있으며, 할머니들만의 전용쉼터는 마을회관을 사용하고 있다.

또 한때는 공동묘지가 있었던 부지에 현재는 생활체육공원이 조성돼 주민들은 게이트볼을 치거나 정구, 국궁을 하며, 때로는 산책을 하는 등 편리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됐다.

▲ 신랑 2동 주민들이 지난 6일 홍성사랑 장학금을 기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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