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택리 일대 마한 ‘감해비리국’의 수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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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택리 일대 마한 ‘감해비리국’의 수도였다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17.02.02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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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홍주, 마을을 읽다<1> 홍북면 석택리
▲ 마한시대 감해비리국의 수도로 추정되는 망국재에서 발견 된 환호취락유적지.

석택리 환호취락, 목지국·감해비리국의 수도
현재 내포신도시 행정타운 조성, 충남의 수도
덕산과 홍주를 오가는 길목, 부보상들의 쉼터


현재 충남도청내포신도시가 조성되고 있는 홍북면의 석택리는 천년홍주(千年洪州) 역사의 시발점이 되는 곳이다. 삼한시대(三韓時代) 월산에 ‘월지국(목지국)’이 있었다면 마한의 ‘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의 수도는 석택리 일원이었다는 추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석택리는 석교(돌다리)와 택리(직절)로 나누는데, 이 일대는 낮은 야산지대로 마을 앞에 삽교천이 흐르며 주변에는 넓은 농경지가 형성되어 있다. 홍북면의 북동쪽 끝에 있는 마을로 예산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예로부터 예산에서 홍성으로 이어지는 큰 길목에 위치해 있다. 삽교천이 완공되기 전까지는 홍수피해가 잦았던 곳으로 실제로 땅속 깊은 곳에서는 갯벌토양이 나오는 곳이기도 하다. 지형적으로 보면 주변의 들판이 한때 물길이었을 가능성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청동기시대부터 물과 인접한 구릉지에 거주를 시작하면서 원삼국시대까지 집단주거지를 이룬 것이라는 의견에 설득력이 더하는 대목이다. 결과적으로 ‘목지국’과 ‘감해비리국’의 수도였거나 집단주거지였음을 증명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실제로 석택리 직절마을에는 선사시대의 유적이 많이 확인되고 있다. 소당산과 망국재에는 ‘고린장’이나 ‘고려장’ 등으로 불리는 선사시대 고분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지금은 말무덤재를 감싸고 도로가 삼각형을 이루고 있는데, 과거 덕산과 홍주를 오가는 길목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면서 부보상들의 쉼터였다. 솔밭고개는 부보상들이 하룻밤을 묵어가는 주막도 있던 곳이다. 직절과 돌다리의 경계를 이루는 고갯마루에는 서낭당이 있었는데, 이곳이 ‘망국재’이다. 조선말기 고종황제가 승하하자 사람들은 이곳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며 나라가 망한 것을 한탄하며 통곡하였고, 3·1만세운동도 이곳에서 불렀다고 전해진다. 지금껏 ‘안산’이라 불리던 작은 동산이 망국재인데, 이곳이 바로 마한의 ‘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의 수도였던 명당자리이다.

▲ 석택리 직절마을 전경.


■홍주, 삼한시대 마한의 ‘감해비리국’
우리고장 홍주(洪州)의 역사를 논하거나 고찰할 때 특히 ‘천년홍주(千年洪州)’를 말하고자 할 때 우선 벽에 부딪히는 것이라면 역사에 대한 문헌의 기록이다. ‘홍주(洪州)’에 대한 문헌의 기록이 모두 고려 초기부터 시작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홍주의 주변에 위치한 작은 군현들도 백제와 통일신라 이전의 기록이 남아 있는데 반해 9세기 이전의 홍주의 역사와 관련된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홍주(洪州)가 문헌상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927년(고려 태조 10)에 왕건이 운주(運州)에 들어갔다는 기록으로, 모든 문헌에 운주(運州)는 홍주(洪州)라고 주기하고 있다. 다시 말해 927년에 고려 태조 왕건이 운주에 들어가 성주 긍준(兢俊)을 성(城) 아래에서 패퇴시켰으며, 934년에 스스로 운주 정벌에 나서 견훤군을 대파하자 웅진(熊津) 이북 30여 군현이 그 소식을 듣고 스스로 항복해 왔다는 기록이다. 고려 초에 일어난 사실을 기록한 이러한 내용으로 볼 때 홍주는 이미 금강 이북지역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었으며,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었음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하지만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는지는 현재로서는 명확하지가 않다. 구석기시대의 유적은 발견된 바 없기 때문이다. 다만 신석기시대의 유적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했음은 분명해 보인다. 지석묘(고인돌) 유적과 같은 청동기시대 유적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마한의 54개 소국 중 적어도 4개의 소국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목이다.


마한의 건국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와 있지 않으나, 조선시대까지는 기원전 2세기 초에 기자 조선의 준왕(準王)이 위만(衛滿)을 피하여 바닷길로 달아나 ‘월지국(月支國)’에 세운 나라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로 ‘목지국’이라고도 한다. 목지국의 우두머리는 마한의 우두머리이며, 또한 진왕으로 추대되어 삼한(三韓)의 최고 우두머리였다. 석택리에서 발굴된 유적의 특징으로 볼 때 원주민들은 기원전 3세기 이전부터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한반도 서남부를 중심으로 정치집단을 이뤘고, 목지국을 중심으로 한 소국 연맹의 형태를 유지하였다고 여겨진다. 백제가 체제를 정비하고 고대 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한 고이왕(古爾王) 시기부터 마한의 중심 세력이 목지국에서 백제로 이동하였다고 추측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에도 마한의 잔존 세력은 해안 지방에서 명맥을 유지하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후 근초고왕 때 마한이 완전히 멸망한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홍주(洪州)도 삼한시대(三韓時代)에는 마한의 ‘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이었으며 백제시대(百濟時代)에는 ‘고막부리현’으로 불렸고,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에는 ‘지심주(支尋州)’라 하여 9개현을 관할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후 고려시대(高麗時代) 927년(태조 10)에 ‘운주(運州)’라는 기록과 함께 ‘홍주(洪州)’라 고친 기록이 나온다. 일부 사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월산(月山) 또는 백월산(白月山)’에 마한의 최대강국인 ‘월지국’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따라서 홍주의 진산인 월산에 ‘월지국(목지국)’이 있었다면 석택리에 ‘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이 있었을 것으로 충분히 추정이 가능해 지는 대목이다.

■석택리 유적, 목지국·감해비리국 수도
석택리 환호유적은 지난 2011년 10월부터 재단법인 한얼문화유산연구원에서 진행한 ‘충남도청 내포신도시 주 진입도로 구간 내 문화재 지표조사’ 중 석택리 일원에서 대규모 ‘환호(環濠)취락’(주위에 구덩이를 파서 두른 스스로의 방어를 위해 도랑 등이 구축된 취락)과 ‘주구묘’(周溝墓; 주검을 안치한 주위에 사각으로 도랑을 파서 만든 무덤) 등이 발견돼, 2012년 1월 2일부터 2013년 4월 12일까지 정밀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발굴조사 결과 청동기시대~조선시대 약 1222기의 유구(옛날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 등이 발굴 조사됐다. 당시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들은 ‘동아시아 최대의 환호취락 유적’이라는 의견과 평가를 내놓기도 했다. 석택리 유적의 발굴조사 결과 청동기시대 주거지, 초기철기시대 토광묘, 원삼국시대 주구·옹관묘(크고 작은 항아리 또는 독 두 개를 맞붙여서 관으로 쓰는 무덤. ‘독무덤’이라고도 함), 백제시대 석축묘(돌로 쌓은 무덤), 시대미상 수혈(땅 표면에서 아래로 파 내려간 구멍. 고대인들의 주거지로 이용), 시대미상 토광묘(지하에 수직으로 장방형의 구덩이를 파고 주검을 직접 매장하거나 목관을 사용하는 형식의 무덤. ‘움무덤’이라고도 함) 등의 유구가 발견됐다. 또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 초기철기 시대의 점토대토기, 원삼국 시대의 단경호, 파수부편, 백제시대의 광구호, 관정 등의 유물도 발견됐다. 특히 이번 발굴을 통해 초기철기 시대에서 원삼국 시대를 거쳐 백제시기까지 집단생활의 연속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와 가치가 큰 것으로 분석했다. 발굴 당시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들은 석택리 환호유적에 대해 ‘마한 54개 소국 중 석택리 일대는 ‘목지국’과 ‘감해비리국’의 수도였거나 집단주거지였음이 분명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편 청동기시대부터 물과 인접한 구릉지에 거주를 시작하면서 원삼국시대까지 집단주거지를 이룬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해 관심을 끌었다. 마한(馬韓)에서 백제로의 전환과정을 밝힐 수 있는 유적으로 평가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던 것이다.

특히 석택리 환호(環濠)취락 유적은 초기철기 시대 토광묘에서 발견된 흑도장경호는 이 시대의 표지유물로, 흑도장경호가 발견되었다는 것은 당시 힘 있는 권력자를 정점으로 하는 집단사회가 존재했을 가능성을 나타낸다. 발굴당시 이남석 공주대 사학과 교수도 “초기철기시대 유물은 석택리 유적의 시대적 배경인 3세기 말부터 4세기 초보다 400~500년 앞서 있고 백제시기 석축분은 원삼국 시대를 이어 150년 이상 집단적 거주가 이뤄졌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추가적으로 발견된 유구들은 초기철기·원삼국·백제시기가 중첩돼 있는 형태로 전국적으로도 많지 않아 가치가 크다”고 밝힌바 있다.

▲ 부보상들의 쉼터였던 말무덤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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