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도청 내포신도시 조성으로 마을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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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도청 내포신도시 조성으로 마을이 사라졌다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17.02.23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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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홍주, 마을을 읽다<3> 홍북면 신경리 자경동·신리·주촌마을
홍북면 신경리 자경동 ·신리·주촌마을에 조성된 충남도청 내포신도시 전경.

신경리 자경동·신리·주촌마을 내포신도시 조성 사라져
자경동마을, 김녕김씨·광산김씨 450~500여년 전 입향
국사편찬위, 김녕김씨 충의공 김문기를 사육신에 현창


홍북면 신경리 자경굴(자경동)마을은 홍북면사무소에서 서쪽에 위치한 마을로 북동쪽으로는 신경리 주촌마을, 북서쪽으로는 신리마을이 있었다. 지금은 충남도청 내포신도시가 조성되면서 신경리의 자경동·신리·주촌마을의 원형 등 마을전체가 사라졌으며, 신도시라는 새로운 모습으로 건설되고 있다.

신경리 자경동마을의 가장 대표적인 성씨는 김녕김씨와 광산김씨다. 두 집안 모두 450~500여 년 전 입향한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자경동마을에는 2001년 10월에 건립된 김녕김씨 재실인 성은재(誠隱齋)가 있었다. 성은재에는 입향조인 충의공의 손자인 촌은공(村隱公, 휘(諱)는 경지(敬之)와 그의 아들 영원(永元), 손자 연국(連國), 현손 순무(順武), 5대손 필재(弼載) 등 6세를 모신 사당이었다. 김녕김씨의 자경동마을 입향과정은 촌은공의 부친인 충입공(忠立公)이 일찍이 병자사화의 여화가 두려워 승복차림으로 상주를 떠나 정처 없이 유랑하던 중 홍주인근의 산록과 산세가 험하고 수목이 울창하여 은거하기 좋은 곳이라 판단하여 이곳에 정착했다고 전해진다. 

촌은공의 증조부 충의공(忠毅公)은 1426년 문과에 급제해 한림(翰林) 등을 거쳐 삼군도진무(三軍都鎭撫)로서 1456년 단종(端宗) 복위도모를 영도하다가 탄로가 나 모진 고문에도 끝내 입을 열지 않고 불복함으로 환형(轘刑)을 당했다. 그로부터 275년 후인 1731년 영조 7년 신해년(辛亥年)에 그의 9대손 정구(鼎九)의 송원(訟寃)으로 관직이 회복되고, 지경연춘추관홍문관대제학 성균관사세손이사(知經筵春秋館大提學 成均館事世孫貳師)를 추증받았으며, 충의라는 시호를 받았다. 경상북도 김천시 대덕면의 섬계서원(剡溪書院)에 배향되고 있다. 부조묘는 경상북도 의성(義城)에 있다. 1977년 9월 22일 조선왕조실록에 근거 국사편찬위위원회가 사육신으로 판정하여 서울 노량진의 사육신 묘역에 허장(虛葬)을 모시고 그곳의 의절사(儀節祠)에 봉안했다.

 

신도시 조성 이전의 신경리 자경동 마을 전경.


■사육신으로 현창된 김문기의 후손들
여기에서 자경동마을의 입향조인 촌은공(村隱公)과 부친인 충입공(忠立公)에 관련된 사연이 있다. 촌은공의 증조부이자 충입공의 조부인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 1399~1456, 정종1~세조2)는 조선 전기의 문인으로 1426년(세종 8)에 식년문과에 급제했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했다고 한다. 1430년 예문관 검열(檢閱)·정언(正言)·함길도관찰사를 역임하고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1456년 성삼문(成三門)·박팽년(朴彭年)  등이 주동한 단종복위(端宗復位)의 모의에 가담했다가 모의가 발각되자 고문에 굴복하지 않다가 이개(李塏) 등과 살해되었다. 영조 때 9대손인 정구(鼎九)의 송원(訟寃)으로 복관되었으며, 경북 김천 지례면의 섬계서원(剡溪書院)에 배향되었다. 김문기는 충북 옥천출신으로 아버지는 관(觀)이다.

이후에 단종복위(端宗復位)의 모의에 가담한 사람들 중에 6인의 절의(節義)를 들어 ‘사육신’이라 했는데, 이 사육신에 대한 기록은 남효온(南孝溫)이 쓴 ‘추강집(秋江集)’의 ‘육신전(六臣傳)’에 실리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이후 1691년(숙종 17)에는 국가에서 공인하여 육신을 복관시키고, 이어 1731년(영조 7)에는 김문기도 복관되었으며 1757년에는 충의(忠毅)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후 1791년(정조 15)에는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여러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편정(編定)할 때 김문기는 ‘삼중신(三重臣; 민신(閔伸), 조극관(趙克寬), 김문기(金文起)’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고, 성삼문·박팽년·이개·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하위지(河緯地) 등 6인은 ‘추강집’의 육신대로 ‘사육신’에 선정되었다.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은 정조가 내각과 홍문관에 명령하여 ‘세조실록’을 비롯한 국내의 공사문적을 널리 고증하게 하여 결정한 국가적인 의전(儀典)이다. 이때 김문기에게는 앞서 1453년 계유옥사 때 사절(死節)한 이조판서 민신과 병조판서 조극관과 같은 판서급의 중신이 되는 이유로 ‘삼중신’이란 칭호가 내려진 것이다. 그에 대한 사실을 기록한 ‘백촌유사(白村遺事)’ 3권이 전하며 섬계서원에 향사되었다. 그런데 1977년 7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사육신’ 문제를 규명하기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논의한 끝에 “김문기를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현창(顯彰)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결의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이 결의에 따라 서울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묘역에 ‘김문기의 가묘’가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김녕김씨 ‘김문기’가 사육신이 된 사연이다.

 

신도시 조성 이전의 신경리 주촌마을 전경.


■홍성, 사육신 성삼문의 흔적들 오롯이
따라서 홍성지역에는 사육신 성삼문과 함께 김문기의 후손들이 살았던 곳으로 기록되고 있다. 성삼문은 1418년(태종 18) 도총관인 아버지 성승(成勝)과 어머니 춘천박씨 사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외가인 홍주(洪州)의 노은골에서 출생할 때 하늘에서 “낳았느냐”라고 묻는 소리가 세 번 들려서 그의 조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성달생 (成達生)이 삼문(三問)이라 이름을 지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또한 이 자리는 고려 말 최영 장군(崔榮 將軍)의 생가 터에 외조부 박첨(朴瞻)이 살고 있었으며 노은리를 둘러싼 삼봉산(三峯山)의 하나인 수리봉아래 최영사지(崔瑩祀址)가 있으며 이 마을 입구 성삼문 유허비가 있는데 앞면은 송시열이 비문을 지어 세우지 못한 뒤 윤봉구(尹鳳九)가 뒷면에 다시 그 유래를 적어 세우고 적동(赤洞)을 노은동(魯恩洞)이라고 송시열이 칭했다 한다. 노은단은 사육신(성삼문, 박팽년,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의 위패를 모시고 별사(別祠)에 성삼문 아버지 성승을 모신 충절의 사당이다. 홍북 대인리에는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장군의 묘소가 있으며, 앞산에는 성삼문의 부인인 연안김씨의 묘소가 있다. 유허지에는 ‘충문사’가 세워져 있다.

성삼문은 세종 때의 촉망받는 관료이자 학자이다. 그는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목숨을 잃었다. 이후 한 임금에 대한 충절은 충신의 표본으로 여겨졌고, 그는 스스로의 학문과 신념을 실천하고자 하는 참된 지식인의 표상이 되었다. 노은골에는 유허비가 있고, 유허비 뒷산에 노은단이 자리하고 있다. 노은단은 성삼문이 성장한 유허비(遺墟碑)가 있으며 숙종 2년(1676) 노은서원을 세워 사육신을 봉향한 후 1692년 녹운서원(綠雲書院)으로 사액을 받았으나 1709년 노은서운으로 개칭되었다가 고종 8년(1871) 폐철되자 사육신의 위패를 땅에 묻었다. 이후 사육신의 위패를 노은단에 모시고 향사를 지내고 있다.

한편 자경동마을에 가장 오래되었다고 전해지는 입향성씨로는 광산김씨로 이 마을에서 6대에 걸쳐 500여년 정도 살았다고 한다. 광산김씨의 시조는 신라 헌강왕(憲康王)의 셋째아들 흥광(興光)이다. 자경동마을에 거주했던 광산김씨는 사온직장공파(司溫直長公派) 후손으로 예문관 직제학(直提學)과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지낸 시조로부터 23대손인 철문(綴文)의 직제학공파(直提學公派) 집안의 후손들로 전해진다. 철문공의 손자인 김기두(金箕斗)가 바로 광산김씨 직제학공파의 입향조이다. 김기두는 조선조 명종대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이르렀다고 한다. 홍성지역으로 입향하면서 조부인 철문공과 부친인 남공의 묘소를 옮겨오지 못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철문공의 묘소는 경기도 파주에 있다고 한다.

또한 주촌(수랑뜰)마을이라 불렸던 신경3리 주촌마을은 옛날에는 ‘수랑뜰’이라 불렀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술을 잘 먹어서 ‘술주(酒)’자를 썼으며 술을 잘 먹는 마을이란 뜻이라고 한다. 전주이씨와 경주김씨가 많이 살았으며, 특히 6·25한국전쟁 때에도 별다른 피해를 보지 않았던 마을로 전해지고 있다. 지금은 충남도청 내포신도시 조성으로 인해 옛 마을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신도시로 변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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