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조국의 광복소식과 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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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조국의 광복소식과 홍성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17.03.18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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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홍주, 지역사를 다시 읽다 <2>
1945년 10월 홍성 8·15 해방군민대회 후 시가행진 모습.

손재학, 홍성에서 일본 패방과 민족의 광복소식 가장 먼저 접해
8월 15일 손재학은 유승준과 일본 천황 항복소식 라디오로 들어
8월 18일 홍성국민학교에서 홍성군민민중대회, 해방축하식 거행
홍성군자치위원회, 일본인 군수 요청 옛 동헌인 안회당에 사무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충남지역의 중심인 대전에서 발행되던 ‘중선일보’가 마침내 민족의 해방과 일본의 항복에 대해 자세히 보도했다. 특히 이날 중선일보의 기사는 전부 한글로 인쇄됐는데, 충남도민들은 오랜만에 ‘한글신문’을 보고 다시 한 번 감격했다. 당시 충남도청에서 한국인 직원의 정신적인 리더로 신망을 얻고 있던 충남도 광공부장 현석호는 해방이 된지 이틀 만에 전 직원을 도청광장에 집합시킨 후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이와 더불어 광복과 독립의 기쁨이 전국뿐만 아니라 충남도 전역에서 가득한 가운데 축하의 행렬과 만세의 함성이 강산을 진동했다. 해방을 전후해 홍성에서 주목할 단체로는 ‘가야동지회’가 있다. 일제강점기 말 홍성의 청년지식인들인 유승준, 한보국, 이인형, 이강세, 심상직, 이인상, 송병진, 조영행, 강창록, 김동진, 최덕길 등은 관솔을 따러 간다는 명목으로 가야산 깊숙한 계곡에 모여 정세를 토론하는 조직을 만들었는데, 산의 이름을 따서 ‘가야동지회’라 이름 붙였다.

일제는 제2차 세계대전 말 막바지에 들어간 전쟁을 계속하기 위하여 전투기 연료용으로 관솔을 따게 해 송유를 짰다. 가야동지회는 이런 구실을 틈타 조직했고, 신간회 홍성지회 당시 실무자 그룹을 중심으로 그 다음세대 인물들로 유승준을 중심으로 한 중도우파와 한보국을 중심으로 꾸려진 토착사회주의 계열이 실질적인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홍성에서 일본의 패방과 민족의 해방인 광복소식을 가장 먼저 접한 사람은 손재학 이었다. 손재학은 1945년 8월 12일 밤 자신을 찾아온 옛 서울청년회의 지도자 이영으로부터 ‘일본이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제의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으나 이를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8월 14일 유승준이 찾아와 ‘15일 천황의 중대방송이 일본의 러시아에 대한 선전포고가 아닌가’라고 말했을 때에도 일본의 항복제의 소식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8월 15일 손재학은 유승준의 집에서 유승준과 함께 ‘일본 천황의 항복’소식을 라디오를 통해 들었다.

손재학과 유승준은 8월 16일 아침 최명용의 집에서 시국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자는데 의견을 같이하고 몇 사람을 모았다. 그런데 유승준은 자신이 경영하던 장곡면의 월계금광에서 일하던 김동진에게 연락해 한보국, 이강세, 장인갑, 김규선 등 좌파계열의 인물도 참석시켰다. 이에 손재학은 본래의 취지를 말하지 않았고, 잡담만하다가 사실상 회의를 무산시켜 버렸다. 손재학과 유승준은 8월 16일 저녁에는 유승준의 집에서 서문교회 목사 박설봉, 서문교회 전도사 김기엽, 심상직, 이인상 등은 좌파계열을 배재한 채 다시 모임을 가졌다.

이 과정에서 손재학은 한보국 등 좌파를 배제할 것을 주장했으나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에 의해 참여시키기로 결론이 났다. 이 자리에서 이들은 ‘홍성군민민중대회’를 열기로 의견을 모으고 ‘홍성군민민중대회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이후 8월 18일 오전 10시 홍성국민학교 교정에 인파로 가득 찬 가운데 ‘해방축하식’이 거행됐다.

 

광복소식을 메인으로 다룬 해외신문들.


이날 축하행사는 대회장인 윤대영의 개회사에 이어 준비위원장인 손재학의 경과보고, 유승준의 해방사, 화교대표 강기백의 축사로 이어졌다. 신간회 지회장을 지낸 윤대영은 대회사에서 “우리는 앞으로 국토의 모래알 한 개도 다시는 외적에게 짓밟히는 과오를 범하지 말자”고 역설했다. 애국가 제창, 만세삼창을 끝으로 행사를 마친 민중들은 농악을 선두로 시가행진을 벌였다.

이날 대회가 끝난 이후 서문 밖의 서문감리교회에서 ‘홍성군자치위원회’를 정식으로 조직하고 위원장에 유승준, 부위원장에 손재학을 선임했다. 위원으로는 박설봉, 김기엽, 심상직, 이인상, 김봉룡, 최명용, 송병진, 강창록, 한보국, 전양수, 전명재, 이동진, 이광순, 이강세, 이인현, 최덕길, 김달선, 조영행, 신봉철, 박준택, 원준성 등이다. 이들 참여자의 면면을 보면 좌우를 망라해 자치위원회를 구성했음을 알 수 있다.

우파나 좌파 모두가 대동단결하여 활동을 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각 부서별 책임자를 보면 다음과 같다. 위원장 : 유승준, 부위원장 : 손재학, 서무부장 : 김영환, 재정부장 : 강창록, 조직부장 : 전양수, 보건부장 : 조영행, 선전부장 : 박설봉, 치안대장 : 김동진, 사법주임 : 전명재 등이다.

위원장을 맡은 유승준(1909년 생)은 당시 만 36세였다. 홍성읍 오관리에서 당시 청양의 비봉광산과 홍성군 장곡면 월계리 월계금광을 경영하던 천석꾼 유진면의 아들로 태어났다. 홍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중앙고보를 나온 뒤 보성전문학교에 재학 중 쌍용그룹 창설자인 김성곤과의 폭력사건으로 자퇴했다. 이후 고향 홍성에 내려온 유승준은 장곡면 월계리에 있던 부인의 소유인 월계금광의 지배인으로 10여 년간 일했다.

김영환은 법원에서 서기로 근무하다가  정부수립 이후 판사로 근무하게 됐으며, 5대 국회의원선거에서는 무소속으로 당선되기도 했다. 강창록은 한용운의 아들 한보국의 처남이었다. 치안대장을 맡은 김동진(1891~1951)은 안동 김씨로 김좌진의 친동생이며, 1927년 신간회 홍성지회에서 상해 임시정부의 지시를 받아 중국 황포군관학교에 파견, 훈련을 받게 한 사람이었다. 당시 유승준은 만 36세, 손재학(1901년 생)은 만 44세, 한보국(1905년 생)은 만 40세였다.  다른 사람들도 대체로 30~40대에 해당하는 사람들로 ‘홍성군자치위원회’가 이처럼 젊은 사람들이 주도했음을 알 수 있다.

1920년대 무공회와 신간회에서 활동한 김연진(1893년 생), 박원식(1894년 생) 등은 당시 50대 초반이었는데. 이들은 소장층에 의해 밀려 지역의 정치나 사회활동에서는 사실상 소외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50대 중반인 김동진만 예외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한편 자치위원회는 제1차 회합에서 다음의 9개 사항을 결의했다. ①치안대장에 김동진을 선임하고 대원을 50명으로 한다. ②민족역량을 집결하기 위하여 일체 파벌행동을 배제한다. ③행정질서에 협조하여 국가재산의 손실을 방지한다. ④관공서원에 대한 보복행동을 엄금한다. ⑤일체의 친일행동을 금지한다. ⑥일정(日政)이 약탈한 전쟁물자는 해당 기관이 보관토록 한다. ⑦송탄유(松炭油) 자재는 각 학교와 유치원에 분배, 연료에 공(供)한다. ⑧각 학교는 신학기에 대비할 교재를 준비한다. ⑨일본인의 생명 재산에 가해하는 행동을 금지한다. ⑩자치위는 각처에서 일어나는 보복행위를 금지하기 위하여 부락별로 야간순찰을 강화한다.

이들은 각 면에도 ‘면자치위원회’를 구성하여 정치공백 기간의 질서유지를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홍성군자치위원회는 군내의 치안을 유지하고 적산을 관리하는 한편, 만중계몽운동을 전개하면서 장차 수립할 통일 민족국가의 지역적 기초를 다져 나갔다. 이처럼 자치위원회가 질서유지에 가장 힘을 쏟았으며, 파벌 행동 금지와 학생들에 대한 배려로 연료제공과 교재준비 등을 강조한 대목이 눈에 띈다. 홍성군자치위원회는 8월 20일경 일본인 군수의 요청으로 옛 동헌 건물인 안회당으로 사무실을 이전했다.

이런 가운데 8월 말경 서울에서 전국학생연맹의 학생 5명이 자치위원회를 찾아와 자치위원회 간판을 내리고 건국준비위원회의 간판을 걸 것을 요구했다. 이에 자치위원회의 우파 손재학 등은 강력히 반발했으나, 좌파들은 이를 따르지 않을 경우 독립적으로 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들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결국 우파가 양보해 자치위원회는 건국준비위원회의 간판을 함께 걸고, 건국준비위원회 홍성지부의 조직은 자치위원회의 조직을 그대로 계승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홍성군자치위원회는 9월 2일 홍성군건국준비위원회로 개편됐다. 이와 같이 결정한 것은 홍성군자치위원회의 내부 조직은 우파가 주도권을 쥐고 있지만, 만약 좌파가 독립해 나간다면 좌파가 대세를 장악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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