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탁운동과 홍성지역 우익세력, 그리고 정부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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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탁운동과 홍성지역 우익세력, 그리고 정부수립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17.03.31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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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홍주, 지역사를 다시 읽다 <4>

미군정과 경찰의 인민위원회와 농민조합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은 1945년 12월경부터 시작됐는데, 미군정은 구항면농민조합장 이차흥과 5명의 농민조합 간부들이 일제 말 미곡공출과정에서 부담을 주민들에게 전가하고 공출에서 빼돌린 구항면 이장 김호면의 쌀을 해방 직후 압수하여 주민들에게 분배했다는 이유로 폭력행위로 구속했다. 또 1946년 2월에는 인민위원회 보안부장 전명재는 해방 직후 환전상을 불법 감금했다는 이유로 구속돼 8개월 간 복역했다. 1946년 3월에는 인민위원장 한보국도 1945년 10월 광천의 일본인 금광업자가 금괴를 몰래 처분해 도망가려는 것을 적발해 압수한 일을 이유로, 조직부장 이태현, 보안대원 박태원 등과 함께 구속돼 10개월 형을 언도받았다.

한편 홍성군인민위원회 사무실이 홍성읍사무소에서 쫓겨나 적산가옥인 일본인여관 ‘비전옥’으로 옮겨야 했다. 이러한 사태에 대해 1945년 12월 17일 농민조합원들이 홍성경찰서 앞에서 항의시위를 벌였지만 별무효과였다. 이 시기는 홍성군인민위원회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다른 지역도 1946년 1~2월 경 미군과 경찰력을 동원, 무력화에 들어갔다. 또 인민위원회를 약화시킨 결정적인 계기는 신탁통치에 대한 좌익의 태도가 급변하면서부터였다. 인민위원회는 신탁통치가 전해졌을 때 반탁의 입장을 표명하고 홍성에서 신탁통치반대 군민대회 참여를 약속했다가 며칠 만에 태도를 바꿔 찬탁으로 돌아섰다. 이에 우파는 좌파를 ‘민족반역집단’이라고 몰아붙이기 시작했고, 일반 대중들도 인민위원회를 지탄의 대상으로 삼게 됐던 것이다.

1946년 1월 21~22일 대전에서 개최된 충남도인민위원회 군대표자회의 석상에서 홍성군 대표들은 신탁통치문제에 대한 입장변화의 결과 인민위원회의 공신력은 떨어지고, 대중적 반감으로 활동력과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좌파세력의 결정적인 몰락을 가져온 사건은 1946년 10월 항쟁이었다. 대구에서 시작된 민중봉기는 경북과 경남, 전남으로 주로 파급됐다.

충남에서는 홍성, 예산, 서산, 당진 등에서만 봉기가 있었다. 홍성에서는 10월 18일 새벽 2시 갈산과 구항의 경찰지서가 습격당했다. 갈산의 경찰들은 홍성으로 도망쳐 왔고, 새벽 6시 좌익들의 홍성습격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새벽 6시 일부의 군중들이 곤봉을 들고 홍성읍내 동쪽에 모여 홍성시내로 행진해 왔다. 이들이 홍성국민학교 근처에 다다랐는데, 경찰이 발포해 4명의 군중이 숨지고 이들은 가까운 언덕으로 흩어졌다. 홍성에서의 봉기 당시 군중은 정권을 인민위원회로 돌려줄 것과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미군정의 폐지를 주장했다. 또 미군정의 미곡수집정책과 한민당과의 동맹을 비난하고, 토지의 평균분배, 쌀의 공평한 분배, 미소공동위원회의 조속한 재개 등을 요구하는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홍성에서의 10월 항쟁은 미군정에 대한 저항, 미소공동위원회 등의 조속한 재개 촉구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지만 취약해진 대중적 기반마저 경찰 앞에 그대로 드러내 좌익세력의 결정적인 약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됐다.

제헌국회의원들이 대한민국 헌법을 공포하고 기념촬영을 한 모습.

■홍성의 우익세력과 단독정부수립운동반탁운동을 통해 대중적 기반을 확보한 홍성지역의 우익세력은 1946년 7월 7일 독립촉성국민회 홍성군지부를 결성함으로써 일련의 조직정비를 마치고 단독정부수립운동을 본격화했다. 독립촉성국민회 홍성군지부장은 손재학이 맡았다. 독립촉성국민회 홍성군지부는 기독교계 인사를 비롯한 이승만 추종세력과 지역의 친일 자산가들로 구성됐다. 이들은 10월 항쟁을 계기로 경찰의 후원을 받아 면·리 단위까지 지부조직을 확대하는 한편 서북청년회, 대동청년단, 대한부인회 등의 우익단체들을 아우르면서 이승만의 반공·단독정부노선을 지역 차원에서 관철시켜 나갔다.

미국이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해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실시되면서 이들 극우세력은 홍성지역의 지배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선거에 불참한 사회민주연맹, 국민당 계열의 중도우파세력은 뒤에 민주당 홍성군당 결성에 합류해 홍성지역 보수야당의 흐름을 형성했다. 반면 사회주의 세력은 단독정부수립과 6·25 한국전쟁의 과정을 거치며 완전히 배제됐다. 해방 이후 홍성지역의 국가건설운동은 좌우합작의 홍성군건국준비위원회, 사회주의계열의 인민위원회, 극우진영의 독립촉성국민회 홍성군지부로 그 주도권이 넘어가면서 전개됐다.

이 과정에서 나타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신간회 홍성지회, 가야동지회, 홍성군건국준비위원회로 이어진 좌우합작의 오랜 관행이었다. 이 관행은 찬탁과 반탁을 둘러싸고 좌우대립 구도가 정착한 이후에도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으로 유지됐다. 이때 홍성지역의 중소지주 중심의 토지소유구조와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두터운 자작·소작농 층의 존재, 동족촌락 등 지연·혈연을 매개로 한 생활공동체로서의 지역적 통합성은 좌우합작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였다. 실제로 해방 이후 홍성지역의 정치적 대립은 민간차원의 좌우대립보다는 오히려 경찰과 좌익세력 사이의 대립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렇게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 이후에도 기본적으로 유지되던 홍성지역사회의 통합성은 한국전쟁과 보도연맹사건을 계기로 결정적으로 무너졌다. 특히 보도연맹사건은 좌우익 집안간의 상호 보복 살상전을 수반하면서 지역의 민간사회를 두 쪽으로 분열시킨 요인으로 작용했다. 홍성지역의 민간영역을 놓고 볼 때 한국전쟁 이전까지는 아직 분단이 고착화 된 상태가 아니었다. 그것은 분단을 고착화 시키는 중앙차원의 이러저러한 징후들이 지역사회의 통합성에 의해 여과되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홍성은 해방 직후부터 좌우익 세력이 세력 확장을 위해 치열한 대립과 갈등을 계속했다. 하지만 승자는 미군정과 경찰의 지원을 받은 우익세력이었는데, 한편으로는 우익세력은 좌익세력과 맞서면서 내부적인 분화와 권력투쟁을 계속했다. 분명한 것은 자치위원회나 건국준비위원회의 조직적 기반은 일제 시기 민족의 독립운동가이거나 말기의 가야동지회 사람들이 지역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홍성은 대체적으로 보수적인 경향이 강한 지역이면서도 반일적인 성향도 강한 지역이어서 항일독립운동 등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반면 사회주의계열의 사회운동은 상대적으로 활발하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홍성
1945년 해방에서 1950년대까지는 국가건설과 체제선택의 시기였다. 이 기간에 식민지 국가인 총독부를 대체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으며, 경제체제의 성격이 결정됐다. 해방과 분단, 경제위축과 혼란, 인플레이션, 좌우 대립, 6·25 한국전쟁, 부패와 부정선거, 원조경제 등 온통 부정적인 이미지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향하도록 방향을 결정한 실로 중대한 시기였다. 출발점에서 방향을 어디로 잡느냐에 따라서 가는 길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만약 대한민국의 수립에 실패했거나 시장경제체제가 아닌 사회주의체제가 성립했다면 우리는 휴전선 너머의 북한과 비슷한 사회에서 살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대한민국의 건국이 가지는 의미는 총독이 대통령으로 바뀌고 일본인 관리가 한국인 관리로 바뀌었다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인이 자신을 대표하는 의회를 통해 정부를 구성하고 과세에 대한 동의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의미를 지닌다. 식민지 국가인 총독부도 조세를 거두어 공공재를 공급했지만, 총독은 오로지 일왕에게만 책임을 질 뿐 재정운영을 비롯한 일체의 통치행위에 대해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어떠한 동의도 구할 필요가 없었다. 3년간 미군정 기간을 거쳐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통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식민지에서 벗어나 자립적인 국가를 형성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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