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환 전 재무부장관 숙환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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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환 전 재무부장관 숙환 별세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17.04.14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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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관료로 ‘한강의 기적’견인차… DJP연합성사 막후 협상자
국회의원 4선, “박근혜 대통령 임기 제대로 마칠지 걱정”우려
대선의 계절…이 한 장의 사진? 1997년 대통령선거에서 ‘DJP연합’의 주역이었던 김용환 전 자민련 수석부총재가 별세했다. 당시 한광옥 새정치국민회의 사무총장과 DJP단일화협상을 주도해 실현시키면서 정권창출에 성공했다. 사진은 왼쪽부터 DJP단일화협상을 마치고 마지막 서명 당시 김용환 자민련수석부총재,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 김종필 자민련 총재, 한광옥 새정치국민회의 사무총장의 모습.

김용환(金龍煥·85) 전 재무부장관이 지난 7일 숙환으로 별세하면서 ‘과거의 사진 한 장’과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직언’이 새삼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김 전 장관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제 브레인’으로 산업화를 이끌었고, 1985년 정계 입문 뒤에는 4선 국회의원을 지내며 ‘내각제주의자’란 평가를 받았다. 1932년 충남 보령에서 출생한 김 전 장관은 공주고·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1956년 제7회 고시행정과에 합격, 재무부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1965년 9월 청와대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주재한 금리인상을 위한 회의에서 당시 33세의 재무부 이재과장으로 말석에 앉아 있던 그가 “실패하면 제가 책임지겠다”고 말해 박 전 대통령 눈에 들었다고 한다. 이후 재무부 이재국장, 세정차관보 등 요직을 거쳐 1970년 대통령 외자관리담당비서관으로 청와대에 들어갔다. 대통령 외자관리담당비서관 시절에는 모든 채권·채무관계를 무효화해 기업의 이자 부담을 크게 줄여준 이른바 ‘8·3 사채동결 조치’를 추진했다. 1973년 대통령 경제담당특별보좌관을 거쳐 대통령 경제수석, 40대 초인 1974~1978년까지 재무부장관을 역임했다. 경제관료로서 1970년대 ‘한강의 기적 견인차’라는 평가와 함께 정부 주도의 고도성장과 경제개발 정책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부가가치세’ 입안자로도 잘 알려졌다.

1978년 장관직에서 물러나 미국 캘리포니아대와 일본 게이오대 등에서 객원연구원으로 공부하다 1985년 공주고등학교 6년 선배인 김종필 전 국무총리를 찾아가 정치재개를 촉구, 신민주공화당을 창당 정책위의장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김 전 장관은 1988년 13대 총선(충남 대천·보령)에 출마해 당선됐고, 이후 16대까지 내리 4선 국회의원을 했다. 키는 작지만 머리가 좋고 아이디어가 풍부해 ‘꾀돌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깐깐한 성격의 완벽주의자라는 평가도 받았다. 정치권에 들어와 1990년 ‘3당 합당’과 1997년 제15대 대선 직전에는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한광옥 부총재와 막후협상을 벌여 대선후보 단일화와 당선 후 국정 공동운영을 조건으로 한 ‘DJP(김대중·김종필)연합’을 성사시키는데 큰 공헌을 했다.<위 사진 왼쪽>  DJP연합 등 한국정치사의 주요 장면에서 ‘막후 협상자’ 역할을 맡았다.

민주자유당 정책위의장, 자유민주연합 사무총장과 수석부총재 등을 지냈다. 자민련시절 공주고 8년 선배인 양순직 국회의원, 6년 선배인 김종필 총재와 함께 ‘공주고 3인방’으로도 불렸다. 1997년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대선 승리 후 비상경제대책위원회 대표위원과 한국외채협상단 수석대표를 맡아 IMF외환위기 극복에 큰 역할을 했다. 재무부 관료였으나 오랜 기간 야인으로 있던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를 금융감독위원장에 앉힌 사람도 김 전 장관이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가 내각제 합의를 파기하자 김종필(JP) 전 총리와 결별하고 1999년 자유민주연합을 탈당, 한국신당을 창당하기도 했다. 이때 ‘내각제 전도사’란 별명이 붙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9년 세상을 떠나기 전 완성된 자서전에서 김 전 장관의 인재 보는 안목에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이후 ‘박근혜의 멘토’로 역할을 했다. 1999년 박정희 전 대통령기념사업회 부회장을 맡은 후 2012년 박근혜 전 대통령 당선까지 이른바 ‘원로 7인회’ 멤버로 박 전 대통령을 도왔다. 박 전 대통령이 서강대 재학시절 박정희 전 대통령의 명으로 경제학 과외를 해준 것이 인연이었다고 한다. 2012년 박 전 대통령이 당선된 뒤에는 “대통령이 싫은 소리를 듣지 않으려 한다”는 우려의 말을 주변에 했고, “최태민의 그림자를 지워야 하고, 정윤회 씨를 멀리하는 게 좋겠다”고 직언을 하면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멀어지며 관계가 소원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김 전 장관은 측근들에게 “박근혜 대통령이 임기(任期)를 제대로 마칠지 걱정된다”고 우려하기도 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실제로 우려가 현실화 된 셈이다.

유족으로는 나춘구(79) 여사와 아들 기주(건양대 교수)·기영(개인사업)씨가 있으며, 김 전 장관의 국회의원 지역구를 물려받은 김태흠 국회의원(충남 보령·서천, 자유한국당)은 김 전 장관의 국회의원시절 보좌관으로 공주고 출신이다.

한동안 모셨던 김용환 전 재무부장관(4선 국회의원)의 명복을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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