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신문 창간 10년, 홍성지역의 언론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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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신문 창간 10년, 홍성지역의 언론을 말하다
  • 한기원 기자
  • 승인 2017.06.16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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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지역신문‘홍동소식’ 맥 이은 ‘주간홍성’ 군민주주모집 창간

한겨레신문 창간 이후‘주간홍성’창간 시·군단위 지역신문 효시 역할

홍성지역언론, 1989년‘주간홍성’창간 20여년 만에 ‘홍주신문’창간해

1987년 6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이한열 사망사건 등이 터지며 우리사회의 민주화운동 열기가 극에 달했다. 이는 서울과 대도시뿐만 아니라 지방으로 점차 확산됐고, 급기야 홍성에서도 전교조와 농민회를 중심으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수많은 최루탄이 발사됐고, 시위대 연행에 항의하는 철야농성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적어도 홍성군민으로서는 매우 중요하고 커다란 이 사건이 기존의 중앙언론 매체에는 단 한 글자도 보도되지 않았다. 때문에 당연히 홍성 외곽지역의 주민들은 당일 서울에서 벌어진 민주쟁취투쟁시위는 알아도 지역에서 벌어진 일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군민들은 지역신문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자발적으로 나서서 군민주(郡民株)를 모금하기 시작했다. 1988년 12월 1일 드디어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인 ‘주간홍성’이 창간되기에 이르렀다. 그 이후 많은 지역신문들이 당시 ‘주간홍성’으로부터 자극을 받거나 직접적인 도움을 받아 창간되기 시작했다.

 

    주간홍성 창간호 홍성 홍주신문 창간준비호.

 

■전국 최초의 지역신문 모델 ‘홍동소식’
이에 앞서 홍성군 홍동면에 있는 풀무학교 출신인 이번영은 1984년부터 ‘홍동소식’이라는 월간신문을 만들었다. 지역주민들과 타지에 나가있는 고향출신의 출향인사들에게 발송되는 소식지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1986년 12월 홍동면 풀무소비자협동조합에서 발행하던 ‘홍동소식’은 정부에 의해 강제폐간 당했다. 이번영의 ‘용감했던 홍성사람들-풀뿌리 언론운동’편에는 “1980년대 우리나라 최초로 창립된 풀무소비자협동조합은 조합원뿐만 아니라 지역주민 전체가 서로 소식을 교환하고 돕는 지역공동체 형성을 목표로 한 달에 한 번씩 소식지를 펴냈다.

‘홍동소식’은 한 달에 한번씩 16절 모조지에 공판타자를 쳐서 16쪽 내외로 인쇄해 주민들에게 나눠주는 유인물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일부 출향인까지 합해 매회 750여명이 나누어 봤다. 그런데 이 작은 동네소식지가 만들어진 2년 만에 막강한 군사정권에 의해 강제로 폐간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 보잘 것 없는 동네소식지가 무엇 때문에 폐간당할 만큼 막강한 권력의 눈에 거슬렸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지방자치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부록을 펴낸 적이 있는데 군청 고위 공무원 측에서 문제 삼으려 했다는 소식을 간접적으로 들은 게 전부다. 16절지 16쪽으로 만든 이 부록은 ‘지방자치’ 특집을 통해 홍동의 지방자치 역사자료를 게재하고 외국 지방자치의 사례를 실었다. 

그런데 문제는 홍성군 역대 국회의원 선거 자료였다. 즉 1978년 12월 12일에 치른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홍성읍의 투표율이 112.3%가 나왔던 것이다. 유신독재 체제 아래에서 실시한 투표로서 1만 4102명의 선거인 중 1만 5486명이 투표를 해 선거인보다 1384명이나 더 많은 표가 나온 자료를 게재하며 이상하다는 어감으로 보도했던 것이다. ‘홍동소식’은 1986년 12월 20일자로 ‘홍동소식 종간호’라는 제목 글자에 죽음을 상징하는 굵고 검은 테를 두르고 두 쪽에 걸쳐 그간의 과정을 밝히고 마감한 것으로 알려진다.

‘홍동소식’ 폐간을 계기로 당시 한겨레신문의 창간모델을 벤치마킹해 군민주 모집을 바탕으로 1988년 12월 ‘주간홍성’이란 이름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주간이 창간됐다. 당시의 ‘주간홍성’이 지금의 ‘홍성신문’이다. 이를 계기로 전국의 시·군단위에서 수많은 지역신문의 창간으로 이어지며 지역신문의 효시가 된 셈이다.


 

  홍성민보. 홍성지역언론 홍성청소년신문 TONE.


1988년 12월 1일 창간한 ‘주간홍성’은 숱한 사연을 간직한 채 2005년 말 창간 17주년을 맞으면서 ‘홍성신문’으로 제호가 바뀌고, 그동안 대표이사를 맡았던 고광성 발행인이 정치권에 출마하면서 대표이사가 바뀌고 수십 명의 기자들이 현장을 떠났다고 한다. 이에 앞서 그동안 ‘주간홍성’ 창간을 주도했으며, 편집국장을 맡았던 이번영 국장은 ‘주간홍성’을 떠나 1999년 10월 10일 ‘홍성청소년신문 TONE’를 창간, 타블로이드판 24쪽의 창간호 1만 5000부를 찍어 세상에 내놓았다.

1999년 5월 20일 홍성군내 중·고등학생 33명을 모집해 5월 29일부터 6월 19일까지 제1차 기자학교를 열고 기자단을 구성, 교육을 실시했다. 교사 10명으로 편집자문위원을 위촉하고, 7월 12일 창간준비호 1만 5000부를 만들어 무작위로 배포하며 군민들에게 알렸다.

‘주간홍성’ 편집국장을 접은 이번영 발행인이 격주간으로 국내 최초로 지역 청소년문화를 가꾸어 가기 위해 청소년들이 직접 만들었던 ‘홍성청소년신문 TONE’은 언론학자들로부터 “지역 청소년문화의 개발, 진정한 NIE의 실천”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창간 2년 만인 2001년 12월 말 홍성청소년신문사의 운영을 접고, 홍성YMCA로 옮겨 월간으로 발행하다가 3년여 만에 참여 학생 수가 줄어들며 문을 닫았다. 이후 이번영은 월간 홍성NGO소식지 ‘함께하는 사람들’과 월간 ‘아름다운 홍성’ 등을 창간하며 언론문화 활동을 벌였으나 지금은 본래 몸담았던 ‘주간홍성’인 ‘홍성신문’에서 대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주간홍성’창간 20년 만에 ‘홍주신문’ 창간
홍성지역의 지역언론사(地域言論史)는 참으로 부침이 많았다. 하지만 홍성지역 언론사(洪城地域言論史)를 말하면서 김양수와 고광성, 이번영은 빼놓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김양수는 1963년 한국일보 지방주재기자 1기생으로 선발된 홍성지역 최초의 주재기자로서 홍성지역 언론뿐만 아니라 지역사와 지역의 문학을 선도한 장본인이다. 또 고광성과 이번영은 1988년 홍성지역에서 최초의 지역신문 창간을 주도한 주역으로 꼽히는 인물들이다.

‘주간홍성’이 1988년 12월 창간한 이후로 홍성지역에서는 10여개의 지역신문이 창간됐으나 모두가 창간 1~2년 만에 폐간, 또는 신문사가 문을 닫는 현상이 20여 년 동안 계속됐고, 이후 ‘주간홍성(홍성신문)’이 독주하는 형국이었다. 지금까지 홍성지역에서는 홍주신보, 조양신문, 홍성군민신문, 홍성민보, 홍성청소년신문 TONE, 홍성투데이, 충남투데이, 내포신문, 홍성경제신문 등의 이름(제호)으로 창간된 신문들이 현재 폐간, 또는 문을 닫은 지역신문들로 알려지고 있다.

지난 1988년 12월 ‘주간홍성’이 창간한 이후 20여년 만인 2009년 6월 16일 홍주 땅에서 창간한 ‘홍주신문’은 80년 만에 홍성·예산으로 이전이 확정된 충남도청의 새 청사기공식 첫 삽을 뜨던 날, 첫 얼굴을 선보이며 고고성을 울렸다.

이후 ‘홍주신문’은 창간 2년차인 지난 2011년부터 올해까지 충청남도 지역언론지원사업에 7년 연속 선정되면서 충남의 중심언론으로 자리하게 됐다. 또한 창간 3년차인 지난 2012년부터는 문화체육관광부·한국언론진흥재단·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역신문 우선지원대상사에 선정, 올해까지 6년 연속 선정돼 정부에서 공인하는 지역언론으로 자리매김 했다. 

한편 한국ABC협회에서 평가한 ‘2016년도 주간신문부수 공사보고서’에 따르면 홍주신문의 발행부수는 3875부로 시·군단위로 발행하는 전국의 지역신문 중에서 유료부수 77.15%로 전국 17위,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우선지원선정사 중 11위, 충남지역신문 중 4위를 차지하는 결과로 조사됐다. 결과적으로 ‘홍주신문’은 창간 10년 만에 전국 10위권의 지역신문으로 성장한 결과로 나타나며, 30년 역사의 ‘홍성신문’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함께 충남도청소재지인 홍성지역에서 발행부수 1만부의 양대 지역신문으로 자리를 굳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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