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산의 정기가 안온하게 감싼 복쟁이들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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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산의 정기가 안온하게 감싼 복쟁이들의 마을
  • 취재=허성수/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7.12.20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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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일구는 색깔 있는 농촌마을사람들

<30> 갈산면 취생리 취생마을
취생마을은 봉화산이 안온하게 품고 있는 형세라 마을 사람들은 그 기운이 재앙으로부터 보호하고 자녀들을 바라게 자라게 해준다고 믿고 있다.

갈산면 취생리는 봉화산 서쪽 양지바른 곳에 넓은 들판을 바라보는 비옥한 평야지대로 서산시와 경계 너머에는 농토로 변한 천수만의 간척지가 바다를 향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그래서 취생마을 농가 중에서는 100마지기 이상 대농이 5가구나 된다. 또 취생마을 앞을 지나가는 29호선 국도 건너편에 7년 전 조성된 홍성갈산농공단지가 있고, 그 옆에도 홍성일반산업단지 조성사업이 거의 마무리돼 일자리 걱정이 없다.

■일자리 제공하는 농공단지와 산단
“우리 마을은 80가구에 주민은 160명 정도 됩니다. 거의 농업에 종사하고 그 중 10명은 농공단지와 산단에 근무합니다.”

취생마을 이의수 이장의 말이다. 그 역시 300마지기의 벼농사를 하는 대농이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도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농사다. 그를 포함해 5농가들 모두 서산 현대농장에서 농사를 짓는 전업농이다. 이 이장은 취생마을 주민 가운데 500마지기의 농사를 짓는 전업농도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대규모 농지를 가진 전업농은 농기계를 종류별로 다 갖추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다. 끝도 없이 펼쳐진 농지에 벼를 심고 가꾸고 거두는 일은 인력으로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기계화 영농을 해결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적은 규모의 영농을 하는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고령화로 기력이 없는 데다 농기계도 제대로 없다. 그래서 대농들이 고령농의 농지를 위탁받아 영농을 하기도 하고 모내기철과 추수 때 소농들을 위해 기계로 필요한 일을 맡아 거들어 주기도 한다. 그래서 농번기가 되면 전업농은 자기 영농뿐 아니라 소농과 고령농의 일까지 도맡아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진다.

취생마을에서 가까운 농공단지에 출근하는 주민 10명은 대부분 60~70대의 고령에 기술도 없어 대부분 환경미화원, 식당일, 경비 등의 일을 한다. 그래도 일반 직장에서 은퇴한 나이에 꾸준히 일정한 액수의 월급을 받으며 일할 수 있고, 그것도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곳에 가까이 있으니 이 마을사람들에게 적잖은 행복이다.

“요즘 최저임금이 보장되니까 적어도 연봉 2000만 원 이상 받는 것 같습니다. 젊은이들이 기술직으로 들어가면 연 3000만 원 이상 꽤 대우받겠죠.”

이의수 이장은 기존 농공단지와 함께 지금 산단까지 조성되고 있어 동네에 좋은 일자리를 제공하고 젊은이들의 유입으로 마을이 활기를 띨 것으로 전망하면서도 공장에서 발생하는 소음이 단점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밤에 기계소리가 제법 크게 들려 밤잠을 설치기도 한다고 했다. 그래도 마을에 주는 이득이 많아 크게 반대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취생마을 경로당 전경.

■봉화대의 흔적 남아 있는 봉화산
취생마을에는 주민들이 비빌 언덕이나 다름없는 봉화산이 있다. 해발 228m,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역사적인 흔적이 남아 있어 마을사람들은 자랑스러워한다.

2010년 발행한 갈산면지에 따르면 봉화산은 백제시대 때부터 성이 주변의 산들과 연결돼 축조된 요새였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산성은 동북~서남 방향의 주봉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축성된 부분이 있고, 다른 한쪽으로는 북북서쪽으로 연장된 한층 낮은 산성을 따라 계속해서 축성된 부분이 있다.

전자는 둘레가 약 190m에 달하는데 성벽은 정상으로부터 약 10m 가량 내려와 너비 4~5m 내외의 내호의 윤곽을 확인할 수 있을 뿐 대부분 성벽의 원형을 잃었다. 봉수의 시설은 봉화대의 터만 확인될 뿐 정확한 구조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의수 이장은 봉화산 꼭대기에 올라가면 성벽이 붕괴된 곳에서 기와조각이 발견된다며 봉수대의 흔적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또한 봉화산은 풍수지리학적으로도 주민들 사이에 길운의 원천으로 여겨지는 신령한 산이다.

“봉화산이 마을을 안아주고 있는 형세여서 각 가정에 우환이 없도록 지켜줍니다. 군에 입대한 자녀들은 사고 없이 근무하고 제대를 했고, 다들 열심히 노력한 만큼 잘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큰 재앙도 없었어요.”

이 이장은 봉화산의 기운을 받고 자란 사람들은 다 잘 풀렸다며 전직 교육장, 공기업 임원 등 성공한 출향인들의 이름을 열거하기도 했다.

“아버지 말씀이 취생마을 아이들은 바르게 자라기 때문에 불량아가 없고, 다 도덕적으로 착한 성인으로 성장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다 잘 풀려요.”

이 이장의 아버지는 갈산농협 조합장을 3선까지 하고 은퇴한 이기남(86) 씨다. 봉화산의 기운이 감싼 덕에 탈선할 수 없다는 말이다. 홍성군에서는 봉화산을 오르는 등산로를 잘 조성해 주말에는 농공단지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물론 많은 주민들이 즐겨 오른다고 한다. 정상에는 전망대가 마련돼 서산시 해미읍과 천수만, 안면도까지 다 한눈에 들어온다.

또 봉화산에는 내존사와 봉성사, 2개의 불교사찰이 있다. 그리 오래 된 절이 아니지만 봉화산을 신성하게 여기며 숭배하는 신심이 자연스럽게 불심으로 이어져 취생마을 주민 대부분 불자가 됐다. 이 이장의 말에 따르면 취생마을 80가구 중 10가구 정도가 기독교, 나머지 70가구는 불교 신자라고 했다. 취생마을 문병수 노인회장은 교회 장로로 주민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다.

■고들빼기 재배로 농가 부수입 올려
주민들은 주로 벼농사를 하면서 고들빼기를 재배해 소득을 올리는 농가도 있다.

“마을에서 고들빼기로 최고 5000만 원의 소득을 올리는 농가가 2가구나 됩니다. 그 밖에 20여 농가는 연 1000만 원의 수익을 올립니다.”

이 이장은 고들빼기가 비닐하우스가 필요 없어 시설 투자비가 적게 들고 비교적 다른 작물보다 재배하기 쉬운 편이어서 서산시 고북면에서 많이 한다고 했다. 그래서 바로 이웃한 서산시의 영향으로 주민들도 7년 전부터 재배하기 시작했는데 지금도 서산시 고북농협을 통해 출하를 한다.
취생마을 주민들은 봉화산 정상에 봉화대를 도 문화재로 지정해줄 것을 바라고 있다.

“오래 된 기와 조각도 나오니까 문화재로 지정해 보호할 가치가 있습니다. 군에서 도로부터 고증이 가능한 유물에 대해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도록 앞장서 주셨으면 합니다.”
또 서산과 홍성을 잇는 국도29호선 국도에 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는 차량들 때문에 사고가 잦다며 주요 교차로의 신호등이 있는 곳에 CCTV를 설치해줄 것을 요구했다.

■취생마을 사람들

300마지기 벼농사 짓는 대농

이의수 이장
본지가 취생마을 탐방을 추진한 것은 지난 10월 중순경이었다. 그때 기자와 처음 통화한 이의수 이장은 추수기를 맞아 몹시 바쁘다며 11월 초에 추수가 끝나면 인터뷰를 하자고 미뤘다. 막상 약속한 11월 초에 전화를 했으나 그때도 그의 일은 끝나지 않았다. 또 다시 미루기를 반복한 끝에 지난 5일 거의 2개월만에 그와 마주할 수 있었다.  그가 짓는 농사의 규모가 300마지기라는 이야기를 뒤늦게 듣고 정말 쉽지 않은 일을 끝도 없이 감당하느라고 여러 번이나 약속을 미뤄야 했던 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의 일이 끝나도 이웃의 소농과 고령농의 추수까지 해야만 했기에 초겨울의 문턱에 이를 때까지 그는 일에 파묻혀 살아야 했던 농군이다. 정주영 회장이 간척해서 생긴 서산 현대농장은 10년 분할상환 형식으로 분양받아 올해 다 갚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빚 한 푼 없는 대농이 됐으니 봉화산의 기운을 제대로 받은 것이 분명하다.


70대 나이에도 보장된 일자리
 

이난수 주민
취생마을 주민 이난수(71) 어르신은 갈산농공단지가 조성되고 가동을 시작할 무렵 60대 중반의 나이에 경비원에 취업했다. 벌써 7년째 근무하고 있는 그는 그 사이 나이 일흔이 넘었지만 아직 나가라고 하지 않으니 매일 출근할 수 있어 행복하다고 말한다. 매달 꼬박꼬박 150만 원씩 월급을 받는데 그 나이에 이런 직장이 어디 있겠느냐며 그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지워지지 않았다. 자녀들한테 손 벌리지 않고 오히려 용돈을 줄 수 있는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되어 자랑스럽단다. 단지 단점은 하루 24시간 근무하고 다음날 24시간 쉬어야 하기 때문에 명절 연휴에 맘 놓고 쉴 수 없다는 점을 꼽았다. 그래도 그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근무하겠다는 태도다.
“동료 중에는 74세의 경비도 있어서 나도 75세까지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90세 노모 봉양하는 효자
 

이승수 노인회 총무
“우리 마을에는 할머니들이 매일 마을회관에 모여 식사를 같이 해 드십니다. 1년에 관광여행 2회, 외식 3회 정도 하십니다.”
이승수 노인회 총무는 인근 농공단지에서는 기름보일러에 마을회관 난방용 등유를 1년에 한 번 채워준다며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감사를 표했다. 이승수 총무는 90살 노모를 모시는 효자이기도 하다.<끝>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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