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에 돌아가 고향사람 섬기면서 노후 보낼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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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에 돌아가 고향사람 섬기면서 노후 보낼 계획
  • 취재=허성수/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8.05.12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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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향인 인터뷰<4> 최재흥 인제대학교 서울백병원 대외협력부장
최재흥 회장은 성실성 하나로 환자 유치에 큰 공을 세웠다.

예산농전 5년제 졸업 후 부모님 농사 도우며 고향 정착
군 제대 후 가축값 폭락하자 정리하고 서울행 열차올라
서울 백병원에서 허드렛일 하다가 원무과 정규직 발탁
올해 퇴직하면 고향 내려와 농사지으며 노후 보낼 계획


홍동향우회 최재흥(61) 명예회장은 고향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서울 중구 을지로 인제대 서울백병원 대외협력부장으로 활동하는 그의 명함만 봐도 진한 향토애를 느낄 수 있다. 명함 뒷면에 ‘고향을 사랑하는 일들’이라는 제목으로 △홍성군 자매결연체결로 의료혜택 △홍성군 무료의료봉사 홍동면 중점 △홍성의료원 협력병원체결 응급처리 △홍동한우 직접 애용으로 홍보대사 △홍동향우회장으로 농산물 판매 역할 등을 쭉 열거해 놓았다. 2015년부터 지난해 말까지 향우회장을 맡았다가 명예회장으로 물러난 후에도 그의 고향사랑은 좀처럼 식을 줄 모른다.

사실 지난 30여 년간 서울의 최고 명문 대학병원에서 그가 행정직원으로 시작해 원무과장과 대외협력부장으로 한결같이 자리를 지켜올 수 있었던 것은 고향이 든든한 버팀목이 돼줬기 때문이었다. 의료환경이 열악한 고향 사람들을 끊임없이 유치했고 그것은 곧 서울백병원의 경영에 크게 기여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지금도 그는 한 달에 평균 1억 이상, 1년에 10억 이상 애향심 마케팅으로 수익을 올려 서울백병원에서는 치료에 전념하는 명의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57세였던 2014년 12월 31일 정년퇴임을 해야 했던 그가 1년 후 2015년 12월 1일 다시 백병원으로 부름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이런 탁월한 능력 때문이었다. 병원 측은 어쩔 수 없는 정년 규정 때문에 일찍 물러나야만 했던 그를 재활용하기 위해 다시 불렀다. 그에게 대외협력부장이라는 직함을 주고 3년간 더 일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는 마침 홍동향우회 회장으로 취임한 후여서 재경 회원들은 물론 고향 홍성군과 홍동면을 대상으로 적극 환자를 유치하며 병원 측에 보답했고, 의료진을 데리고 내려가 정기적으로 의료봉사활동을 하는 등 고향 사람들에게도 적극 보답했다.

그는 훤칠한 키에 친화력을 엿볼 수 있는 온화한 표정, 처음 만난 사람이라도 자신의 편으로 만들 수 있는 사교성이 돋보였다. 영국신사 같이 단정하고 매너도 좋았다.

■ 가축값 폭락 농사 포기 상경
홍동면 월현리 개월마을이 고향인 최재흥 회장은 홍동초(45회), 홍성중(22회), 예산농업고등전문학교(10회)를 나와 젊은 날 농사꾼으로 잠깐 살았다. 1970년대 예산농전은 고교 3년 과정과 초급대학 2년 과정을 포함, 5년제 고등교육기관이었다고 한다. 1978년 2월에 졸업을 한 그는 부모님의 농사일을 도우며 소와 돼지를 사서 길렀다. 그러나 1년 후 입대할 무렵에는 돼지값 파동으로 어려워졌다. 기르던 돼지를 버리다시피 하며 처분했으나 1981년 제대할 때는 돼지 품귀현상으로 가격이 올랐다. 가축값이 오르자 돼지뿐 아니라 소도 사서 길렀다.

“1981년 제대하고 돼지새끼 한 마리당 4~5만원씩 했습니다. 1985년 말까지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수입소가 들어오면서 소값이 폭락했어요.” 돼지도 마찬가지로 가격이 곤두박질했다. 새끼 돼지를 사서 길러서 팔아도 그 동안 먹인 사료값이 안 나올 정도였다. 그래서 그는 돼지와 소를 처분하고 간신히 축협에 진 빚을 갚았다.

1986년 그는 고향을 등지고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예산농전에서 농학만 5년 동안 공부한 그가 마땅히 갈 만 곳이 없었다. 무슨 일이든 몸을 아끼지 않고 죽기살기로 하겠다는 각오로 취업한 곳이 인제대 서울백병원이었다.

“백병원에는 아는 분이 한번 가 보라고 해서 갔어요. 저한테 처음부터 좋은 자리 줬겠습니까.”
의사도 아니고 행정업무를 볼 자격도 준비돼 있지 않은 시골 청년이 할 수 있는 일은 환자의 침대를 끌고 정리하는 것부터 온갖 허드렛일이었다. 그는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면서 저녁에는 근처에 있는 종로행정고시학원에 다녔다. 의료행정과 관련한 강의를 들으면서 전문용어를 익혔다. 의료용어를 모르니 심부름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2년 동안 다니면서 의학용어를 열심히 배웠습니다. 1년 반 정도 공부하는 동안 원무과에 자리가 났다고 하더군요. 인사카드를 보고 적합자를 찾는데 결국 제가 채용됐습니다.” 외계어 같은 전문용어들을 점점 알아들으면서 무슨 일이든 익숙하게 해내는 모습이 경영진의 눈에 뜨인 그는 그 후 어엿이 넥타이 매고 일할 수 있는 정규직이 됐다. 그래도 그는 배움에 대한 갈증 때문에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1993년 방송통신대학 농학과 3학년에 편입했다. 5년제 예산농전의 학력은 전문대졸로 인정을 받기 때문에 같은 전공으로 2년을 더 공부한 그는 1994년 2월 졸업식에서 농학사 학위를 받았다.

“농학과 의학은 공통된 것이 많아요. 유전학과 육종학 등 대상이 식물과 가축일 뿐이지 사람과 원리가 비슷합니다.” 최 회장은 그 후 독학으로 손해사정인 시험 준비도 했으나 너무 어려워 중도에 포기했다. 다시 다른 공부를 하려고 고민하던 중 부산에 있는 인제대 보건대학원이 서울캠퍼스에서도 정원을 절반씩 나눠 뽑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1997년 서울캠퍼스 첫 신입생으로 바로 지원을 했는데 다행히 앞서 방송통신대에서 공부를 했던 것이 큰 도움이 됐다. 엄연히 석사과정의 특수대학원이었으므로 필요한 학사학위를 받아둔 것이 요긴하게 활용된 것이다. 근무 후 밤마다 대학원에 가서 열심히 공부한 결과 그는 2년만에 석사학위를 받았다.

“저는 뭐 하나 끝나고 나면 가만있지 않습니다. 뭐든지 하고 싶었습니다. 남한테 피해를 주지 않고 해낼 때마다 쾌감을 느꼈습니다. 향우회장도 제 성격이 맞으니까 했습니다.” 낮에 열심히 근무하면서 꾸준히 주경야독하며 실력을 쌓아 나가는 동안 병원에서도 승승장구했다. 원무과에서 계장(5급)이 됐다가 2011년부터 원무과장으로 승진했다. 2013년부터 혼자서 환자를 유치해 매년 10억 원 이상 매출을 올린 기록을 보여주며 최 회장은 말했다.

“죽기살기로 병원 일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매출을 올렸죠.” 서울의 대형 종합병원도 무한경쟁시대를 맞아 가만히 앉아 기다리기만 하면 도태되기 십상이다. “영락교회를 비롯해 교회와 평화방송 등 서울의 주요 종교단체와 회사를 쫓아다니며 MOU를 채결했고, 2004년에는 예산군청과 홍성군청과 MOU를 체결했어요. 또 홍성의료원과 협력병원으로 협정도 했어요. 그 후 인제대 서울백병원에 하루 평균 홍성군민인 10명씩 옵니다.”

MOU체결로 고향에서 올라오는 환자들은 특별대우를 받는다. 병원비도 10% 정도 감액시켜 주는 데다 최 회장이 나서서 상전 모시듯 친절하게 안내하며 때로는 돌아가는 교통비도 자신의 호주머니를 털어 챙겨준다. 

■ 농업인후계자 1기로 귀향준비
그는 2015년 11월 초에 홍동면 향우회장으로 선출됐다. 어깨가 무거운 만큼 열심히 고향을 오르내리며 애정을 쏟았다. 2017년 말 물러나 명예회장으로 추대된 후에도 그는 여전히 고향사랑으로 무장돼 있었다.

“제가 향우회장을 맡았을 때 사업자도 아니고 월급 타는 사람으로서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기업인들을 찾아다니며 많이 후원을 받아 제가 처음 물려받았던 것보다 곱절 넘은 1000만 원 가까이 모아 후임자에게 물려줬지요.”

그는 올해 11월말까지 근무하고 퇴임을 준비하고 있다. 그 후 그의 계획은 고향에 가서 노후를 보내는 것이다. 지금도 주말마다 내려와 농사를 짓고 있다는 그는 오래 전 전공했던 분야여서 병원 행정업무보다 더 잘 할 자신이 있다. 이제 나이 60을 넘겼지만 그래도 시골에 가면 젊은 농부가 될 것이기에 주민들을 섬기며 봉사하겠다는 뜻을 조심스럽게 밝히기도 했다.

“농촌에 가서 지도자 역할을 해보려고 합니다. 제가 사실은 농업인 후계자 1기입니다. 1981년 제대하고 예산농전 학장의 추천으로 서울 등촌동 새마을교육원에 가서 2~3주간 농업인 후계자 교육을 받았죠.” 서울에서 세일즈맨 정신으로 환자를 유치하면서 쌓은 인간관계의 노하우와 리더십을 농사와 지역사회에 접목해서 어떤 변화를 몰고 올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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