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면에서 딸기 생산량이 가장 많은 부촌으로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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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면에서 딸기 생산량이 가장 많은 부촌으로 성장
  • 취재=허성수/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8.06.22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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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일구는 색깔있는 농촌마을 사람들<12>

농촌마을 희망스토리-은하면 대율리
대율리는 옛날부터 땅이 넓고 비옥해 부농이 많았다. 지금은 딸기농이 18가구나 돼 은하면에서는 가장 많은 생산량을 자랑한다.

은하면 대율리는 옛날부터 밤나무가 많아 ‘밤실’이라고 불려졌다.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결성현에 속했다가 조선시대 말엽에 결성군 은하면에 편입됐고, 1914년 일제 강점기에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대가곡리와 율리의 일부를 병합해 ‘대율리’라는 명칭을 얻었다고 한다. 

■ 비옥한 경작지 많아 살기 좋은 마을
과거 마을의 지명이 될 정도로 많았던 밤나무는 1960년대에 경작지 확장사업의 일환으로 밭을 일구면서 사라졌다. 마을 앞으로 16번 군도가 남북으로 지나가고 있으며, 남쪽은 은하면 소재지를 경유해 홍성으로 통한다. 마을 서쪽 앞으로는 부창산 너머 은하면 금국리와 경계를 이루고, 북쪽으로는 다릿고개를 경계로 해 구항면 비봉리와 경계를 이룬다. 마을 남쪽으로는 은하면 유송리와 경계를 이룬다.

남당항, 광천읍, 홍성읍에서 10km의 거리로 떨어진 꼭짓점이지만 교통은 썩 좋은 편이 아니다. 비 면소재지로서 마을은 큰 편이다. 대율리는 지금 전체 88가구 188명의 주민이 살고 있어 은하면에서 가장 큰 동네다. 젊은이도 많은 편이어서 청년회가 20명이 넘으며, 초등학교 학생이 여남은 명이나 된다. 농촌마을 치고는 비교적 남녀노소 고루 살고 있다. 주민들은 대율리가 옛날부터 땅이 비옥하고 넓어서 농사를 지어먹고 살기 좋아 외지로 떠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고 한다.
 

왼쪽부터 이양희 새마을지도자, 전용섭 할아버지, 정지호 이장 등 대율리 사람들.

“동네가 옛날부터 비옥하고 농사지을 땅이 많아 굶어 죽을 일은 없었어요. 다른 마을에 비해 지하수가 좋고 저수지도 조그만 하지만 2개가 있습니다. 꼭 필요할 때 쓸 수 있는 물이 있고 풍수해도 잘 없어요. 안전하고 살기 좋은 마을이었습니다.” 정지호 이장은 대율리에 밭이 40ha. 논이 52ha의 경작지가 있어서 주민들이 부지런하기만 하면 농사로 먹고 살 만한 마을이었다고 했다. 지금도 외지에서 오는 사람들을 위해 내어줄 땅이 없는 마을이다.

“귀촌인들이 들어올 자리가 없어요. 동네사람들이 안 나가고 사니까 외지사람이 들어올 터가 없습니다.” 이양희 새마을지도자의 말이다. 독거노인이 간혹 별세하면서 빈집이 나와도 도회지의 자녀들이 팔려고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몇 년 지나면 땅이 매물로 많이 나올 것으로 이 지도자는 전망했다. 대율리 마을에 축산농가가 없는 청정마을이라는 점도 귀촌인들에게는 매력적인 요소가 되고 있다. 대율리는 딸기 농사로 고소득을 올리는 마을로도 유명하다. 현재 15ha 땅에 18농가가 딸기농업을 한다.

“딸기는 우리 마을이 은하면에서 생산량이 최고로 많습니다. 상하국 마을보다 3배는 더 돼요,”
정 이장은 홍성군에서도 대율리가 가장 먼저 딸기를 시작했을 것이라면서 197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가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라고 회상했다.

“그 때는 시설 재배보다 노지 재배를 했죠. 물론 많이 심어 출하하면 쌀보다 수지가 맞았습니다.” 김기태 마을총무도 1987년도에 군 복무하던 중 휴가를 나와 딸기 재배하는 일을 도와준 기억이 있다면서 자신이 20살도 안 됐을 때부터 시작한 농사라고 회고했다.

“여기서 수확한 딸기를 열차로 실어 서울에 보냈으니 지금처럼 생산량이 많지 않아도 소득이 좋았습니다.” 1980년대 후반에는 딸기농업이 발전해 대나무로 뼈대를 세워 비닐하우스 재배를 시작했다. 그 때부터 딸기농사로 안정된 생활이 가능해지면서 외지로 떠나는 대신 고향을 줄곧 지키게 된 이양희 지도자는 요즘 후회할 때도 있다. 정부가 발전된 농법으로 적극 지원하고 권장하면서 대량 생산된 딸기를 싸게 사먹을 수 있는 도시 소비자들만 좋아졌을 뿐 농민에게는 그에 걸맞게 소득이 높아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딸기농사로 부자 되기는 어렵고 먹고 살기 위해 할 뿐입니다. 정부는 농민들이 생산비도 안 나오게 정치를 합니다. 딸기는 타 작물보다는 수익이 제일 낫지만 품이 많이 듭니다. 정부에서 초기 비용으로 비닐하우스 짓는 것만 절반 정도 지원해주고 그 이상 투자는 농민들이 해야 합니다.” 이 지도자는 차라리 어렸을 때 농사로 먹고 살기 힘들었다면 고향을 떠나 공부해서 다른 일을 하고 있었을 텐데 평생 붙들고 있는 농사가 힘들고 어렵다는 말을 반 농담 삼아 했다.

■ 청년 많고 초교생도 10여 명 넘어
마을에 남은 30~40대 젊은이들도 대부분 딸기농사를 한다. “수도작은 기본적으로 다 합니다. 딸기가 전업이고 논농사는 부업이죠.” 다행하게도 젊은 부부들은 아이들을 3~4명씩 낳아 길러 그나마 마을에 큰 활력소가 되고 있다. 옛날에는 이 마을에 중학교가 병설된 초등학교도 있었다. 1951년 개교한 대하초등학교는 동하절기 방학 때를 제외하고는 1년 내내 대율리를 들썩거리게 할 정도로 활기찬 풍경을 연출했다. 그러나 심각한 이농현상과 출산율 감소로 학생이 없어 1994년에 문을 닫았다.

지금 10여 명의 초교생들은 4km 가량 떨어진 은하초등학교로 스쿨버스를 타고 다닌다. 수업을 마치면 스쿨버스가 아이들을 태워 대율리 마을 안에 있는 은하참사랑교회에 내려놓는다. 교회에서 운영하는 지역아동센터에서 방과후교실에 참여해 선생님들의 지도를 받고 공부를 한다. 지역아동센터는 아이들에게 저녁식사까지 제공한 후 스쿨버스에 태워 집까지 데려다 준다. 주민들은 통학부터 아이들 방과후교실과 저녁식사까지 챙겨주는 교육복지제도에 만족하는 듯 했다.

대율리는 여느 농촌마을에서 보기 힘들게 교회가 3개나 있다. 제칠일안식교 은하참사랑교회, 성결교단 소속 대하제일교회, 경기도 고양시 뿌리와가지교회에서 대하초교를 인수해 수양관을 겸해 운영하는 주찬양전원교회다.

10년 전 대율리마을회관에는 농업기술센터가 시범사업으로 5000만 원을 들여 찜질방을 만들었다. 한 동안 주민들이 잘 이용해 왔으나 최근에는 마을기금이 떨어지면서 전기료가 적잖게 부담이 돼 운영을 중단했다고 한다. “심야전기를 이용해도 한 달에 40만 원, 많게는 70만 원까지 나옵니다. 요즘은 마을에 들어오는 수익금이 없어 7개월 전부터 찜질방을 운영하지 않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장례를 치를 때 상주로부터, 혹은 마을 주변 개발로 외부에서 보상차원에서 이런저런 명목의 발전기금이 나오게 되면 마을 운영자금으로 비축해서 쓸 수 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장례도 화장을 선호하면서 주민들이 상여를 맬 일이 없어졌다.
이양희 지도자는 안마의자 2개도 고장이 나 사용하지 않고 있다며 사후 수리비도 군에서 지원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금은 주찬양전원교회 수양관으로 활용되고 있는 대하초등학교 옛 교정. 교사는 그대로 남아 있어서 외관이 중세 유럽풍 지붕으로 바뀌기는 했지만 1994년 전 폐교되기 전 학교를 다녔던 동문들에게는 옛 추억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종교시설로 바뀐 대하초교… 주찬양전원교회, 동문행사 빌려줘
한때 대율리 마을의 자랑이었던 대하초등학교는 지금도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주찬양전원교회라는 간판을 단 종교시설로 바뀐 것이다.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뿌리와가지교회에서 15년 전 교육청으로부터 매입을 해 일종의 수양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학교 교사로 쓰던 2층 건물은 헐지 않고 리모델링을 해 중세 유럽풍 저택처럼 독특한 지붕모양으로 바뀌어 주변의 푸른 숲과도 잘 어울린다. 운동장은 국제 규격에는 다소 미달되지만 잔디를 심어 축구경기를 할 수 있게 잘 가꿔놓았다. 축구장 울타리 쪽 숲에는 개인이나 가족 단위로 와서 쉬며 기도할 수 있도록 나무로 지은 방갈로도 예쁘다.

대하초등학교 총동문회에서는 매년 주말 하루를 빌려 체육대회를 한다. 옛날 추억이 묻어 있는 교정에서 옛 친구들을 만나 회포를 나누기 위한 목적으로 하는 행사여서 주찬양전원교회에서는 기꺼이 빌려준다. 대하초교 총동문회는 지난 10일 2018년도 체육대회를 여기서 성대하게 치렀다. 교회 관리를 맡고 있는 전일문 장로는 이렇게 말했다.

“동문들이 모교 이름으로 모여서 하는 행사인데 마땅히 빌려드려야죠. 그 분들이 여기가 아니면 어디 가서 동문체육대회를 하겠습니까.” 여름철 도시지역 교인들이 와서 빌려 사용하는 수련회 장소로 반짝 인기를 누리지만 요즘 교회도 학생수 감소로 예전 같지 않다고 전 장로는 말했다. 10년 전 전 장로 부부가 서울에서 내려왔는데 지금 2명을 더 보태 모두 4명, 최소한의 직원으로 관리를 하고 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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