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도 변호사의 거룩한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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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도 변호사의 거룩한 죽음
  • 이재인 칼럼위원
  • 승인 2018.08.03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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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험한 세상을 살아오면서 몇 분의 멘토로 모신 분이 계신다. 그런데 마지막 멘토인 분이 얼마 전에 저 세상으로 가신 최영도 변호사다.
내게는 이제 이 땅에 내 인생을 살아가면서 힘든 일이 있거나 번민거리가 생기면 나이가 칠십이 넘은 웃어른한테 늘 찾아갔다. 어른들은 마다하지 않고 내 문제에 해답을 찾도록 유도하셨다. 험한 세상에서 얼마나 고맙고 느꺼운 일인지 이 참에 고백을 해야 할 것 같다.
필자가 20년 전 도라지꽃 향내가 진동하는 여름날 낯선 서울 전화가 울렸다. 나는 02라는 지역번호 앞에서 한동안 망설이다 핸드폰을 열었다. 대체로 시골에 사는 나한테 서울에서 전화를 걸어 올 몇몇 잡지사 외에는 보이스피싱 사기 전화였기에 주저했다.
“예, 충청도 예산입니다.”
나는 헛기침을 하고는 무게 잡아 말문을 열었다.
“이재인 선생님 맞지요?”
“예, 그런데요?”
“어제 경향신문 문화면에 난 인터뷰 기사를 읽었구요, 나는 최영도 변호사입니다. 그런데 이 선생한테 귀한 것 몇 점을 건네줘야 할 것 같은데 올 수 있겠어요?”
전화기 송수신음이 카랑카랑한 음색이었다.
“그럼 국가인권위원장이신가요?”
“그렇소. 내 전화 찍혔을 테니 서초동 법원 근방에 와서 전화하고 만납시다. 자세한 목록은 그 때….”
“아, 감사합니다. 일간 찾아가 뵙겠습니다.”
나는 부지중 허리를 꺾었다. 최영도 변호사는 김대중 정부 시절 초대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이었다. 급수로 치자면 장관급에 오른 반열이었다. 그 분은 재야 운동권의 변론을 맡아 봉사하신 큰 어른이었다. 직급이 높아 내가 당신한테 허리를 굽힌 게 아니었다. 정직과 성실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취해서 평생 무료 변론과 자문으로 사셨다.
만석지기 땅을 팔아 일제 강점기 일본으로 반출된 문화재를 사들였고 처가의 만석지기 재산까지 털어 문화재를 역수입한 애국자가 오늘의 간송미술관 주인 전형필 선생이다. 그 다음으로는 최영도 변호사로 평생 우리 토기를 사들였다. 변호사 수임료, 월급을 모두 토기 사는데 쏟았다. 그러다가 30년 전에 몽땅 국가에 기부했다. 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내가 서초동 변호사 사무실에서 처음 뵙던 날 당신께서는 필설로 헤아리기 어려운 인장문화재 한 보따리를 내게 안겨주셨다.
“유물객주라는 말이 있어, 다 임자 찾아줘야 한다는 내 뜻 알아줘요. 또 이 선생도 다음 세대에 나처럼 남겨 전해야 혀.”
그 날 나는 엎드려 인장문화재를 접수했다. 그리고 또 한 번 허리를 꺾었다.
내가 쓸쓸해지고 허망할 때 멘토로 찾아갔던 여러 분 중 마지막 어른이 가셨다. 사람은 보석의 원석이다. 그러한 큰 그릇 속에서 갈고 닦이면 우리도 따라서 옥석이 될런가. 최영도 변호사의 죽음 앞에 살아가는 방법론이 오늘따라 귀에 먹먹해진다.  

이재인<충남문학관장·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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