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내포지방 배경 장편소설 김성동의 ‘국수(國手)’ 화제
상태바
충청도 내포지방 배경 장편소설 김성동의 ‘국수(國手)’ 화제
  • 한기원 기자
  • 승인 2018.09.13 13: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소설가 김성동의 집념과 혼으로 27년 만에 완결시킨 작품

한국문학의 살아 있는 거장, 소설가 김성동(金聖東·71·사진)의 장편소설 ‘국수(國手)’가 솔출판사에서 총 6권으로 출간돼 화제다.

‘국수(國手)’가 태어나기까지 무려 27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1991년 11월 1일 문화일보 창간호에 연재를 시작한 이후 2018년이 돼서야 드디어 완간했다. 장편소설 ‘국수(國手)’는 오랜 시간 김성동의 집념과 혼으로 완결시킨 작품으로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이나 박경리의 ‘토지’를 잇는 대서사시다. 총 6권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을 육필(손으로 직접 쓴 글씨)로 완성했다는 점에서 오늘의 현실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수(國手)’는 바둑·소리·악기·무예·글씨·그림 등 나라 안에서 최고의 경지에 오른 예술가나 일인자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 소설은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 무렵부터 동학농민운동(1894) 전야까지 각 분야의 예인과 인걸들이 한 시대를 풍미하는 이야기를 아름다운 우리 조선말로 펼치며 그려내고 있다. 19세기 말 충청도 내포지방(예산·덕산·보령)을 배경으로 바둑에 특출한 재능을 가진 석규와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나 이름난 화적이 되는 천하장사 천만동, 선승 백산노장과 불교비밀결사체를 이끄는 철산화상, 동학접주 서장옥, 그의 복심 큰개, 김옥균의 정인 일패기생 일매홍 등 역사기록에 남지 않는 미천한 계급의 인물들이 대격변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야기다. 충청도 홍주골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건들과 탐관오리들의 학정, 이에 맞서는 인민들의 항쟁을 다루고 있다. ‘국수(國手)’ 속 주요 인물들은 역사기록에 남지 않는 미천한 계급의 인물들로 서세동점의 대격변 속에 사라져간 조선을 ‘살아낸’ 무명씨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국수(國手) 김성동 저 | 솔 | 9만 원(전 권)

‘국수(國手)’는 조선의 역사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지만, 정치사보다는 민중의 구체적 삶과 언어를 박물지(博物誌)처럼 충실하게 복원해낸 풍속사이자 조선의 문화사이며, 조선인의 심성사(心性史)에 더 가깝다는 평가다. 종래의 역사소설이 사건·정치사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반해, 그 사건들에 직·간접으로 맞닥뜨리고 때로는 그것을 일구기도 하는 인물 개개인을 중심으로 거대한 민중사적 흐름을 당대의 풍속사와 문화사, 정신사적 관점에서 참으로 맑고 아름다웠던 우리말로 서사하고 있다. 동시에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 면면히 이어져 온 개인적 ‘전(傳)’ 양식을 이어받으면서 제국주의에 갈갈이 찢긴 우리말과 문화와 정신의 뿌리를 생생히 되살려내고 있기도 하다.

특히 김성동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충청도의 사투리를 사실적이고 감칠맛 나게 풀어놓는다. 130여 년 전 조선의 역사를 정면으로 다루면서도 민중의 구체적인 삶과 언어를 충실하게 복원해냈다. 김성동은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갈갈이 찢긴 우리말과 문화, 정신을 되살리고자 100년 전의 언어와 풍속을 가능한 원형에 가깝게 재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당대의 풍속과 언어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조선의 멸망 직전까지 생존해 있던 온존한 겨레말을 정밀하게 복원하고 생생히 되살려 낸 ‘국수사전(國手事典)’도 독자들의 이해와 편의를 돕기 위해 작품 본문에 뜻풀이를 달아 별권으로 만들었다. 올해 문재인 대통령은 여름휴가 기간 중 김성동의 장편소설 ‘국수(國手)’를 읽었다고 청와대가 전하기도 했다.

김성동(金聖東)은 1947년 충남 보령의 청라면 장현리에서 출생했다. 6·25 한국전쟁 와중에 아버지와 단란한 ‘집’을 빼앗긴 채 유소년기를 보내야 했던 글지 김성동은, 성장기를 줄곧 전쟁과 이데올로기가 남긴 깊은 상처 속에서 방황하다가 19세가 되던 1965년 입산(入山)을 결행했다. 불문(佛門)의 사문(沙門)이 되어 12년간 정진했으나 1976년 하산, 이후 소설가의 길을 걷고 있다. 소설가 김성동은 소설 같은 가족사(家族史)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아버지(김봉한)는 1948년에 예비검속으로 대전교도소에 수감됐고, 1950년에 대덕 산내 처형장에서 돌아가셨다고 한다. 좌익인사라는 이유였는데 제삿날도 몰라서 어머니(한희전)는 그때부터 아버지의 생일날에 제사상을 차려왔다고 한다. 숙부도 대한청년단에게 맞아 죽었다고 한다. 인민군이 진주했을 때 인민위원회 청년위원장을 했다는 이유였다는 것이다. 어머니도 여성동맹위원장을 했다는 이유로 국군이 들어왔을 때 고문을 모질게 당하기도 했다. 외가도 마찬가지였다. 좌익들에게 풍비박산이 났기 때문이다. 외삼촌은 홍성에서 면장을 했는데 반동 부르주아라는 이유로 인민재판에서 처형을 당했다고 한다. 이렇듯 김성동은 충청도, 호서지방·내포테두리, 홍주 골의 땅과도 기묘한 인연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한때는 홍성과 덕산에서도 잠시 머무른 기억이 있는데, 어머니와 외가가 있었다지만 이는 한국전쟁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상흔이었다.

김성동은 1975년 승려 생활을 바탕으로 쓴 중편 ‘목탁조’로 문학과 만났고 이를 장편소설로 개작, 1978년  화제작 ‘만다라’를 출간한 이후 영화로 제작돼 큰 반향을 일으켰다. 작품집으로 ‘피안의 새’ ‘오막살이 집 한 채’ ‘집’ ‘길’ 등의 작품을 썼다. 김성동은 “글 쓰는 기계는 도무지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로지 전통적 방식인 손 글씨가 편하다”며 “국수(國手)를 좀 지켜본 후에 다음 소설을 생각하려 한다”고 향후 계획을 밝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